"내가 모아두질 않았다면 불쏘시개나 용광로에 들어갈 운명들이었죠."건축역사인 동시에 임산의 역사인 목공구 수집은 목원대 이왕기 교수의 평생의 업이다. 흩어져 있던 도구를 모으는 그의 노력으로 사장될 뻔한 역사의 한 자락을 겨우 잡을 수 있었다.과거 없이는 현재와 미래도 없는 법. 어쩌면 우리는 그의 공으로 지금의 현재와 앞으로의 미래를 살아가게 될지도 모르는 일이다. 선을 그을 때 쓰던 먹통, 나무를 깎아내던 대패, 나무를 베어내던 톱……. 현대식 기계가 없던 그 옛날 사용했던 녹슬고 귀퉁이가 닳아버린 목공기구들이 정겹다. 시대의 퇴물로 사라질 자신들의 운명을 소중히 거둬준 주인이 존재했기에 낡은 모습이지만 나름대로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들의 기억에서 사라져간 목공구를 찾아 나선 지 2
목재가 사향산업이라고 말한다면 당당히 "아니다"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 신발사업이 사향이라고는 하지만 나이키는 당당히 돈만 잘 번다며 단순히 국내 시장만을 탓하지 말고 세계시장으로 눈을 넓혀가라고 충고하는 사람. 바로 그가 목재무역의 대가 하나코퍼레이션의 송문호 사장이다. "세계적인 목재회사 홈디포와 세계 2위 기업인 월마트는 팔고 있는 물건만 다를 뿐 같은 정책을 쓰고 있습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생각도 할 수 없지만 지난 3월 포춘지가 선정한 세계 최고 기업 중 5위는 홈디포가 차지했습니다. 특수소매판매별 순위는 세계 1위를 차지했죠. 결코 목재가 사향산업이 아니라는 사실을 보여주는 좋은 예입니다. 중국에도 홈디포 스타일의 마트가 있습니다. 우리는 늘 힘들다고만 하지 다른 산업들처럼 노력을 안 합니
까다로운 일본에 제재목을 10년 가까이 수출했다면 품질은 더 이상 언급할 필요가 없는 것. 목재는 수입만 하는 줄 안다면 오산이다. 비록 원자재는 수입하지만 역수출을 통해 국내 목재산업의 옛 신화를 되찾고 있는 대경종합목재 민윤식 사장을 만났다. 목재업에 몸담은 지 25년, 적지 않은 세월이다. "나무가 좋아서 일을 배웠습니다. 무역으로 시작해서 생산과 영업까지 두루 거치면서 창업을 해야겠다고 결심했죠."그는 상당히 솔직했다. 목재는 사업하기 편한 아이템이라고 말한다. 소를 부위별로 팔 듯이 목재도 용도에 맞게 판매할 수 있는 점이 그가 목재업을 택한 이유다. 14년 전 창업한 이후 가장 어려웠던 일을 묻는 질문에 "이 일을 끝날 때까지는 계속 힘들 것 같습니다. 끈이 느슨해지면 그만큼 퇴보하는 것
우리나라의 주요 목재 수입국인 말레이시아는 2천만헥타아르가 넘는 방대한 산림을 소유하고 있는 목재자원 강국이다. 목재자원이 부족한 한국시장의 전망은 매우 밝으며 반제품보다는 완제품 위주의 수출로 전환하여 고부가가치를 창출하겠다는 말레이시아 아부마카유?? 상무관을 만났다. 농림부 공무원을 시작으로 목재와 인연을 맺게 된 그는 말레이시아 수출공사 연구직으로 근무하면서 일본의 가구?목재가공조사를 통해 목재를 배우게 됐다. 그 후 주한말레이시아대사관 상무관을 발령을 받은 게 3년전, 이제는 어느 정도 한국에 적응해가고 있다."한국어를 하지 못해 처음엔 힘들었지만 영어로 소통이 가능해 그다지 어려움을 느끼진 못했습니다. 갈수록 영어를 구사하는 한국인들이 더 많아지는 것 같습니다. 가족이 함께 한국에 거주하고
산림국장 시절, 산림부의 독립을 위해 부단히 노력했다는 그. 여전히 농림부 산하에 있는 산림청을 볼 때마다 가슴이 아프다는 그는 국내에 사방공사를 처음 시행한 인물이다. 격동의 시절, 칡대신 조림을 하면서 겪어야만 했던 우여곡절을 김영준 전 농림부장관을 만나 들어보았다. 올해로 그의 나이는 여든아홉이 됐다.2세기를 걸쳐 살아온 그의 인생은 말로는 다 표현할 수 없을 만큼 많은 일들이 일어났고 이젠 그 누구도 얘기해주지 않는 일들을 역사책을 보듯 그를 통해 들을 수 있다는 자체가 신기할 뿐이다.여든아홉이라는 나이가 무색할 만큼 건강한 그가 임업역사의 산 증인이라는 것은 참으로 다행스러운 일이다.식목일을 제정한 것도, 사방공사를 한 것도, 헐벗은 산에 조림을 시작한 것도 모두 그가 한일이다. 그의 인생은
그에게 왜 무역만을 고집하느냐고 물었다.대답은 간결했다. “내가 제일 잘하는 일이기 때문에…….”목재산업은 분업화되는 것이 옳으며 제조를 잘하는 사람은 제조를, 무역을 잘하는 사람은 무역만을 해야 한다고 말하는 그는 목재무역 외길만 27년째 걷고 있다. 전문무역인의 역할이 점점 작아지는 게 가장 아쉽다는 산화실업 유재동 사장의 무역인생을 엿보자. 그의 이력서는 참으로 단출하다.남들처럼 이 회사, 저 회사 옮겨 다닌 일도 없고 독립을 해서도 단 한 업체만을 꾸준히 발전시켜왔으니 말이다. 정말 다행스러운 것은 그 어려운 시기들을 지나면서도 산화실업이라는 이름은 결코 바뀌지 않았다는 것이다. 회사 문을 닫지 않은 것만으로도 성공한 사업가 축에 속하는 목재업계에서 그의 이름이 남겨질 것은 당연하지 않겠는가
현직 임산공학과 교수로는 최고 연장자인 정 교수는 임산공학이란 학문이 임학에서 분리되기 전에 학부생활을 했던 터라 변변한 강의 교재조차 없었던 시절이 가장 안타까워 전공서적을 9권이나 저술해 후배양성에 힘썼다. 여전히 학자로서의 노익장을 과시하고 있는 서울대 정희석 교수를 찾았다. 올해로 그의 나이는 63세가 되었다.전국 임산공학과 교수로는 최고 연장자인 그가 여전히 세계적인 학술지에 꾸준히 논문을 게재하고 국제 학술회의에도 열심히 참여하는 모습은 후배들의 본보기가 되고 있다.해외교류를 끊임없이 시도하는 이유를 물었더니 “내가 사람을 많이 만나면 제자들에게까지 이어질 수 있으니까요. 보다 젊었을 때부터 참석했으면 좋았으련만 그 때는 나라가 돈이 없었고 변변한 지원도 없어서 힘들었던 게 아쉬울 뿐이죠”
한국목재신문 최초로 여성 CEO를 만났다.길을 걸으면서도 돈 벌 일을 생각한다는 그는 역시 경영자로서 충분한 그릇이었다. 망치 하나가지고 재생목드럼을 만들기 시작해 지금의 (주)중앙목재공업을 세우기까지 억척스런 아줌마로 살아온 성옥돌 사장의 인생이야기를 소개한다. 초등학교 2학년을 끝으로 마친 학교생활 몸이 약해 잘 걷질 못했던 초등학교 시절, 체육시간에 입을 운동복을 사주시지 않는 어머니 때문에 가뜩이나 남에게 지기 싫어하던 아이는 급기야 학교를 그만두고야 말았다. 초등학교 2년 다닌 게 학력의 전부인 아이가 바로 나다.학교를 그만두고 집안 일을 돕기 시작했다. 집안에 아들이 없었기 때문에 나무하고 농사짓는 일은 내 몫이었다. 너무나 엄하셨던 어머니의 말씀을 어긴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
“자원을 다루는 일을 해왔다는 것이 가장 자랑스럽다”는 세실의 이원규 사장은 90년대 인도네시아 합판 수입의 창구가 세실로 일원화되면서 국내 합판 생산량보다 많은 수입량을 통솔해 중소기업인의 자존심을 지켜온 입지전적 인물이다. 목재와의 인연은 난 엔지니어 출신이다. 합판을 생산하던 동명합판의 무역팀이 분사되면서 유림교역이 설립돼 서울사무소장으로 입사했다. 유림교역은 부산에 본사를 두었으며 서울, 홍콩, 싱가포르, 자카르타에 각각 지점을 두고 있었다.당시 대성목재의 합판설비를 말레이시아와 인도네시아에 수리해 수출하면서 엔지니어링을 담당했는데 그것이 대성목재와 인연이 되어 MDF, PB, 마루판, 태고합판라인과 수지공장 설비를 담당하게 됐다. 인천에서 내가 한일 중 가장 큰 일이라 할 수 있는 이 일을
‘고지식하지만 합리적인 사람’ 그를 표현하는 적당한 말인 듯싶다. 불의와 타협하지 않는다고 말하면 너무 식상할지 모르지만 그는 정말 그랬다.미국 유학시절, 한국인의 좋은 이미지만 보여주기 위해 열심히 공부할 수밖에 없었다는 김 교수.목재방부의 주역 김규혁 교수의 어제와 오늘, 그리고 내일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학자의 길을 걷기까지 고등학교 시절 공부를 안한 탓에 남보다 2년 늦게 대학에 입학했다. 우습지만 대학에 가기로 결심한 이유가 고려대는 나와야 장가를 갈 것 같아서였다. 점수가 제일 낮은 학과를 찾았더니 농대였고 술 잘 사주는 고등학교 선배들이 있는 임학과를 선택했다. 이런 내가 교수가 되리라고는 별로 생각치 않았다. 4학년이 되고 진로를 결정할 때 아버님이 말씀하시길 남자는 명예와 돈을 다 갖
외국에는 100년이상 가업을 이어가는 전통있는 목재회사들이 많다.참 부럽고도 뿌듯한 일이다. 국내에도 드물지만 아버지의 뒤를 이어 회사의 맥을 이어가는 아들들이 있다. 국내 특수목의 선구자인 유성목재의 소수호 사장이 그렇다. 아버지 고 소재경 씨의 뒤를 이어 가업을 잇고 있는 유성목재 소 사장을 만나보자. 가업을 잇게 된 동기는 아버님이 워낙 목재업계에 유명한 분이셨다. 70년대 특수목 분야를 개척하셨는데 새로운 수종들을 들여와 상품화시키는 역할을 하셨다. 특수목의 역사를 고스란히 가지신 분이라 할 수 있다.하지만 아들이 나는 정작 목재에 별 흥미를 느끼지 못했다. 공대를 졸업하고 엔지니어가 되려고 했으나 아버지가 큰 수술을 받게 되시면서 가업을 이어가야만 했다. 79년부터 목재일을 시작해 벌써 2
인천의 대표적인 산업을 말한다면 단연 목재산업이다. 목재가 산업을 주도하던 지난 시절은 듣기만 해도 기분이 절로 좋아진다. 한때 인천 최고의 목재기업으로 자리잡았던 해안실업의 대표이사 이병묵 회장은 일련의 사실을 증명해줄 수 있는 목재산업의 산증이다.목재 1세대로는 드물게 아직도 현장에서 노익장을 과시하고 있는 살아 있는 목재역사 이병묵 회장을 만났다. 목재와의 인연은 어떻게 시작됐나 인천시청에서 공무원 생활을 한 8년쯤 하다가 61년 에 ‘천일건재’를 창업했다. 한때는 인천의 남동염전이 폐지되면서 31만평을 구입해 3년동안 간척사업을 하기도 했지만 결국 실패하고 2만평의 땅과 교환하는 억울한 일을 겪기도 했다. 나의 성공과 실패의 인생은 그때부터 반복됐다.벽돌과 기와를 찍고 제재소를 겸하는 건재상
‘내것이다’‘내것이 아니다’라는 마인드 차이에 따라 엄청나게 상반된 결과를 초래한다는데…….살아오면서 가장 잘한 일은 주식을 실질화하여 직원들과 회사의 공동주인이 되어 기업을 운영해온 일이라는 풍산목재 유승봉 회장의 다음 계획은 국내에 DIY(Do it yourself)를 보편화시키는 일이다. 전공과 다른 목재업에 종사한 이유는장남이었기에 축산업을 하시던 아버지의 뒤를 이어 축산을 전공했지만 한국무늬목(현 한국목재)의 최득수 회장을 만나면서 나의 인생이 바뀌었다. 70년대 특수목의 대부였던 최 회장 밑에서 5년을 일하면서 내 평생의 업이 결정됐다. 난 그분에게 엄청난 무형의 재산을 물려받았다.독립해 기업을 경영하면서도 그분의 가르침을 바탕으로 살아왔다.나무에 대한 특별한 애정이 있다누구나 그렇겠지
독일의 세계적인 인공림인 흑림을 본 충격이 지금껏 임업인생의 방향키가 되어주고 있다는 산림조합중앙회 박경 개발상무는 사유림을 발전시킬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협업경영뿐이라고 말한다. 30년이 넘는 오랜 세월을 임업에만 혼신해온 그의 임업인생이 궁금하다. 임업을 평생의 업으로 삼은 계기는마냥 숲이 좋아서 임학을 전공한 것이 평생의 일이 됐다. 60년대 황폐한 숲을 보면서 일생을 걸고 복구하기로 마음먹었다. 독일로 연수를 갔을 때 임업에 대한 충격은 대단했다. 세계에서 가장 조림이 잘 되어있다는 흑림을 보면서 우리 임업의 미래를 가늠해볼 수 있었다.그간 어떠한 일들은 했는지대학을 졸업하고 처음 입사한 곳은 유엔 산하 한국산림조사 및 개발사업기구였다. 사방사업이 한창일 무렵 조림감독관의 역할을 했다.
“밥그릇이 커지면 담을 밥도 많아질 게 아닙니까?”출혈을 감수하면서도 왜 그렇게 처음 시도를 많이 하느냐는 질문에 이렇게 답변하는 박찬규 사장. 업계 최초라는 말은 이미 그 의미를 상실했다며 회사의 이름과 같이 나무는 자연스레 삶의 일부로 받아들이고 있다는 말을 덧붙인다.장사꾼이 되지 말라는 어머님의 말씀을 신조로 20년을 CEO로 살아오면서 그가 겪은 삶의 이야기가 자못 진지하다. 목재와의 인연은 난 한번도 월급쟁이가 되어본 일이 없다. 늘 남과 다른 삶을 살고 싶었다. 학창시절, 공부엔 취미가 없었지만 조숙하게도 앞으로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에 대해 고민하곤 했다. “뭘해도 남과다르게 살겠다”는 것이 나의 소신이었고 81년에 형님과 함께 흥일목재를 창업했다. 형님은 조언자이자 파트너이자 가장 존경하
빈손으로 미국에 건너가 최고의 마루전문가가 되기까지 그의 노력은 무모하기까지 했다. 영어한마디 못하면서 중고차 하나 끌고 길도 모르는 미국 대륙을 보름동안 횡단하면서 그가 꾼 꿈은 최고가 되겠다는 것. 그가 터득한 미국의 선진 마루기술을 국내에 보급하기 위해 전사로 입국한 피터 염 그가 들려주는 마루이야기. 미국에 건너가게 된 계기 미국 이민바람이 한참 불던 84년, 미국에 혼자서 이민을 갔다. 비자가 잘 안나오던 시절이었는데 20대 초반의 미혼남이었던 내 이민비자가 그렇게 빨리 나온 이유를 아직까지 잘 모르겠다. 아마 내 운명이 그랬던 것 같다.컴퓨터를 공부하려고 바다를 건너갔지만 빈손으로 도착한 미국은 당장 먹고사는 일이 급급한 곳이었다. 미국생활의 에피소드가 있다면 영어도 못하고 길도 모르
국민소득 1만달러 시대의 국가연구기관의 역할은 예전과는 달라져야 한다는 것이 공영토 부장의 생각이다.이제 제품기술에 대한 연구는 민간 기업연구소로 옮겨가야 하며 연구원은 국민보호와 규제기술, 환경보전 연구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는데……. 연구원으로 오래 일했는데 대학 졸업후 연구원에서 일하다가 학위를 받은 후 대학에서 강의를 하기도 했다.75년부터 연구원에 재직하면서 목재가공과장과 남부임업시험장장을 거쳐 올해 1월 임산공학부장으로 취임했다. 그간의 연구실적은색깔에 대한 연구를 5년정도 했었다. 목재의 색깔은 가격을 결정하는 중요한 요소이다. 이 연구 후 청와대 관저 건립에 참여했는데 국산 소나무의 청변을 막아주는 일에 큰 몫을 했었다. 지금도 흐뭇한 일이다.가장 안타까운 연구는 1년정도 진행하
“목재를 가지고 만들 수 있는 건 다 만들겠다”는 포부로 45년을 하루같이 일했다는 홍성명 회장. 94년 명성목재 부도이후 재기를 위해 동터오는 새벽마다 한강을 달리고 또 달렸다는 그가 1년 뒤 재기에 성공해 진성산업에서 황혼의 인생을 불태우고 있다. 목재업은 어떻게 시작했나형제 많은 집의 장남으로 태어나 고등학교를 중퇴하고 일자리를 찾아 나선게 제재소였다. 한국전쟁이 막 끝나고 어려운 시절이어서 누구든지 돈을 벌어야 했었다. 열일곱에 산판에서 원목 구입 일을 시작했다. 필리핀 나왕이나 미국산 제재목 등 수입일도 도맡아 했다. 늘 내가 사장이라는 마음가짐으로 일하다 보니 이십대 초반에 이미 책임자가 되어버렸다. 젊은 나이에 책임자가 됐는데 책임감 있게 일하다 보니 사장에게 신뢰를
회사의 규모가 먼저냐 직원이 먼저냐를 항상 고민하게 되지만 언제나 가족이 중요하다는 생각을 먼저한다는 박관서 사장.‘나중에 보자’는 말처럼 직원들을 힘빠지게 하는 말은 없다며 동업계 거의 두배에 가까운 임금을 지급하는 홈우드 박관서 사장의 경영철학을 들어보자. 직원에 대한 대우가 남다르다던데경영자라면 우선순위가 존재할 것이다. 나에게 있어서는 무엇보다 직원들이 우선이다. 우리 회사가 엄청난 수익을 올리는 것은 아니지만 순이익의 반은 언제나 직원들의 몫이라 생각하고 반드시 분배한다. 업계에서 가장 많은 임금을 지급하고 있는데 타 회사의 두배정도는 될 것이다. 그래서인지 독립은 할지언정 동종업계로 옮겨가는 일은 없었다. 21명의 직원중 10년이상 근무한 직원이 절반이 넘을 정도로 장기근속이 일반화되어 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