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목재인물사  |   대성목재공업(주)  전택보(全澤珤) 회장 편(65)

설봉은 탁월한 ‘아이디어 메이커’

천우사가 부실기업으로 정비된지 불과 4년만인 1975년 말 현재 ‘정상을 달리는 대기업’이라는 말을 들을 정도로 발전하였다는 것은 실로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부실기업으로 정비될 당시 700명의 간부사원들과 6000여 명의 공원들이 모두 떠나가고 불과 90여 명의 간부사원들만 가지고 새출발을 했던 천우사는 이제 다시 500여 명의 간부사원과 2500여 명의 공원을 가진 대기업으로 성장한 것이다.


천우사가 이렇게 빠른 시일 내에 대기업으로 재등장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여러가지 이유가 있었겠지만, 첫째로 설봉의 신용을 꼽아야 할 것이다.   <조선일보>가 1971년 8월17일자 신문에 천우사의 재기를 ‘신용간판 전택보, 활기찾는 천우사’란 제목으로 표현한 것을 보아도 알 수 있듯이 설봉의 신용은 천우사가 재기하는데 큰 도움을 주었다. 하지만 천우사가 이토록 빨리 재기할 수 있었던 것은 설봉이 탁월한 ‘아이디어 메이커’였다는 사실을 간과할 수 없다.


설봉은 항상 말하기를 “아이디어에서는 2등을 해서는 안된다. 항상 1등을 해야한다. 2등은 패배자일 뿐이다”라고 했는데, 그만큼 아이디어에 대해서는 확고한 신념을 갖고 있었다. 설봉은 항상 기발한 아이디어로 사업을 창출해 내었는데, 전자사업의 경우 TV생산사업부문은 1967년부터 착상한 것이었다. 그 착상이 네덜란드 필립스(Phillips)사와 기술제휴를 체결하게 하였고, 1971년 8월에 이르러서는 TV 첫 생산품을 시장에 내 놓을 수 있었으며, 1972년 10월경에는 3억 원을 투입, 구로공단에 부지 1만2000평을 확보하여 건평 1500평의 공장을 짓고 진공관 TV에서 TR-TV로의 기술전환을 했다. 이때만해도 한국의 TV생산기술은 기술제휴 없이는 불가능했으므로 재력에 있어서 열세에 있던 천우사는 기술전환으로 다른 회사와 경쟁하는 길밖에 없었다. 천우사는 국내업체로서는 처음으로 TR-TV를 생산한 회사로서 TV판매량에 있어서는 ‘금성사’와 ‘대한전선’에 이어 3위로 랭크되었다. 그리고 1974년에는 이란 고성능 카세트를 시중에 내놓았고, 컬러TV 개발도 완전무결한 단계로까지 준비해 놓고 있었다.


섬유사업의 경우 설봉은 자체공장이 있어야 하겠다는 생각에서 가리봉동 수출공단 대지 위에 3층짜리 봉제공장을 짓고 수출목표를 1000만 달러로 세웠다. 공장은 12라인으로 직원수만 해도 1000명이 되었고, 섬유공장 단일공장으로는 국내 최대 규모의 공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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