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age_View
일제의 야욕이 서려있는‘인정전’ 세계문화유산인 창덕 궁은 인정전(仁政殿,국보 2 2 5호) -태종 5년( 1 4 0 5 년) 昌德宮창건과 더불 어 건립됐으나 太宗1 8년 ( 1 4 1 8년) 박자청에 의해 다시 지어졌고, 世宗즉위년( 1 4 1 8년) 9월 에 준공됐다. 조선시대에 평민 출신이 최 고위직에 올랐던 당대의 건축가 박자청 (朴子靑)이 창덕궁, 제릉, 건원릉, 경북궁 수리, 경회루 등 많은 공사를 훌륭하게 수 행해서 공조판서와 우군도총제부판사의 지위까지올랐다. 박자청은 원래황희석(黃希碩)의 노복으 로 있다가 궁문(宮門) 입직(入直)군사로근 무했다. 어느날 태조의 이복동생인 의안 대군이 궁궐 안으로 들어가려 하자, 박자 청은 국왕의 명령이 없어¡ 그를 들여보내 지 않았고, 화가 난 의안대군이 발길로 걷 어차 얼굴에 상처가 생길정도로 맞았지만 의안대군은궁궐에들여보내지않았다. 그 후 태조는 의안대군을 나무라고 박자 청을 국왕 경호를 담당하는 호군(護軍)으 로 발탁했는데 그 후 건축에 인정을 받아 서 승승장구했고, 태종은 박자청이 건축 에 탁월한 재주가 있는 것을 알고 재위 8 년( 1 4 0 8년)에는 공조판서로 승진시켰다. 정도전이 서울을 설계했다면 건축은 박자 청이 했다고 해야 할 정도로 대부분의 도 성건물은그의손을거쳤다. 일화를 소개하면 1 4 1 2 년 경회루의 연못을 팠는 데 물이 나오기는 하지만 가득 차지가 않자. 박자 청이 생각하여 물을 모두 빼낸 다음에 물이 스며든 곳을 검은 진흙으로 메우면 물이 고이게 할 수 있다는 방법을 강구해 연못에 물을 가득 채우는데 성공했다. 1420년 원경왕 후가 사망하자, 박자청은 마전(麻田)의 나 루터에 부교를 만들자고 주장했고 완강한 반대가 있었지만 박자청의 뜻대로 부교는 만들어졌다. 덕분에 국장 행렬은 무사히 강을건넜다고한다. 현재 인정전과 인정문 용마루에 우리의 옛 건물에는 찾아 볼 수 힘든 구리로 된 오 얏꽃문양이붙어있는데이것은일제가간 교스럽고 치밀하게 우리왕실을 부정하고 민족정신을말살하려는전략이숨어있다. 오얏꽃은 이화(李花)는‘李씨’를 상징하 는 것으로서 고종황제를 이태왕(李太王) 순종을 이왕(李王)이라고 부른 것도 우리 왕조를일본천왕의밑에 씨족국가로격하 시키려고한만행이었다. 한편 인정전 내부는 원래 흙으로 구워 만든전돌이깔려있었으나 바닥을마루로 바꾸고 유리덧문, 커튼, 샹들리에 전등을 설치해서양식으로개조했고 이는현재까 지그대로있다.
저작권자 © 한국목재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