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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련의 무궁화나무 한 줄기 세찬 바람이 꽃을 맴돌아 나무를 휘감으며 조이며 내려와도 뿌리채 흔들어도 굴하지않고 한곳에 머물러 꿋꿋이 살아가는 것은 보면 우리 마음기댈곳인가보다 우리역사에서 무궁화가 가혹한 수난을 겪은 식물은 무궁화뿐이아닌가 생각된다. 무궁화는 우리민족의 역사와 함께 겨레의 맥락속에 같이 숨쉬어온 꽃이기에 36년 동안에는 민족과 같이 시련을 겪을 수 밖에 없었다. 우리나라를 떠난 독립지사들이 광복에 대한 열정을 구국정신의 상징으로 무궁화를 내세우자 일본은 황급히 무궁화를 보는대로 있는 대로 불태워 버리고 뽑아 없애 버렸다. 그리고 무궁화를‘눈에 피 꽃’이라 하여 보기만 해도 눈에 핏발이 선다고 하고 또 ‘부스럼 꽃’이라 하여 손에 닿기 만해도 부스럼이 발생한다고 거짓으로 무궁화를 탄압하고 수난이 가중되면 될수록 우린 더욱 무궁화를사랑하고 숨겨가면서까지지켜왔다. 시련과 탄압속에서도 굳은 의지로 민족얼을 심어 주고 무궁화 선양에 앞장섰던 남궁억(南宮憶)이 대표적이라 할수있다. 1918년 강원도홍천의 모곡으로 내려가 교회와 모곡학교를 세우고 교육에 전념하면서 무궁화 말살을 위해 광분하는 일제의 눈을 피하여 몰래 무궁화 어린나무를 길러 전국으로 보급하기위하여 묘목작업은 학생들의 실습시간을 이용했다. 또 김매고거름을 주게하여 학생들의 무궁화에 대한 애착심과 국가관념을 넣어 주었고 일제가 무궁화 묘목을 못 팔게 했을 때는 어린 무궁화 묘목과 유사한 뽕나무묘목을 겸해서 길러 뽕나무묘목의 주문이오면 무궁화를 끼워줌으로 해서 전국에 무궁화 번식을 위한 갖은 방법을 다하여 무궁화보급에 앞장서 추진하였으며 또한 1933년 무궁화와 한국역사사건으로 체포1933년'반일애국 사상과 무궁화사건'등으로 구속되기도 하였다. 호는 한서(翰西)로서 홍천군에서는 남궁억 선생의 호를 따서‘한서문화제’매년 군민전체가 모여서 축제를 하고있다 무궁화는 우리나라 건국 당시부터 천지화라고하여 하늘을 가리키는 꽃 이라고불러 우리 민족과 함께 지내온 꽃이라고 합니다. 당시에는 국가의 인재를 양성하는 교육제도가 있었는데, 이들은 머리에 천지화를 꽂고 다녀 ‘천지화랑’이라 불렸다. 훗날, 신라의 화랑이라는 이름은 이렇게해서 생겨난 것으로,‘ 화(花)’는 무궁화를 의미 하며 단군 시대 때 머리에 무궁화를 꽂았던 풍습은 후일 고구려, 신라, 백제로 이어졌고 고려와 조선조까지도 계속되고 고려시대때 나라의 별칭을‘근역(槿域)’, 근화향(槿花鄕)이라고 했고 조선 시대 때 과거에 장원급제한 선비에게 임금이 ‘어사화’라 하여 무궁화를 하사 했다고 한다.

2009년 10월16일 23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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