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막신
‘나막신’은 나무로 만든 신을이르는 말이다. 처음에는 편편한 나무로 된 바닥에 끈을 단 모양이었으나 점차 보통의 신과 같은 모양으로 발달했다. 나막신을 언제부터 신었는지 정확히 알수는 없으나 조선 중기 이후부터는 많은
유물과기록이남아있다. 흔히 비가 올 때 신던 신발로만 알고 있으나 마른날에도 종종 신었다고 하며, 신분이나 남녀노소에 관계없이 사용했다고 한다. 중국에서는‘극’이라 했고, 한국에서는 ‘목혜(木鞋)’라 부르다가 조선 후기부터 ‘나막신’이라 했는데 최남선(崔南善)은 ‘나무신’이 와전된 것이라 했다. 조선시대의 경우 대개 오동나무, 소나무, 오리나무를 파서 신과 굽을 통째로 만들었는데, 남자용은좀더투박했으며, 여자용은측면에 여러가지무늬를 그리거나코를 맵시있게 팠다. 굽 끝에는중국의 극처럼쇠로 된 발을붙여닳는것을막기도했다. 사진은 그간 매장문화재로서 다루어 본 나막신들인데, 그 중 하나가 조금 다른 모습임을 금방 알아 챌 수 있다. 그것은 전라남도 강진의 병영성터에서 발굴 된 것이다. 하멜은 1653년 상선을 타고 일본 나가사키로 가던 중 일행 36명과 함께 제주도에 표류했는데 서울로 이감됐다가 1 6 5 7년부터 강진 병영으로 옮겨 7년동안 생활했다. 이곳에서 생활한 하멜 일행은 네덜란드 양식을 응용한 생활용품을 만들어 활용하기도 했을 것이다. 조선시대 일부 가난한 양반들이 가죽신
을 신을 형편은 못 되고 짚신은 꺼려해 항상나막신만신었다고한다. 그리하여 유난히 가난한 선비들이 많이 살았던 남산에는 항상 나막신의 딸깍거리는 소리가 났고, 이로부터 청빈한 선비를 가리켜‘남산골 딸깍발이’라고 하는 말까지생겼다고한다. 늘어가는 일을 핑계로, 많잖은 나이를 핑계로 도무지 걷지를 않으니 적절한 육체적 운동의 기회를 잃고 있었다. 걸으면서 생각하기를, 걸으면서 일상과 주변에 시선주기를 즐겨보기로 작심하며 일 주변에서 글쓰기 소재를 찾아보았다. 바퀴달린 이동수단은 편리함에 반해 자전거와 자동차의 속도로 주변을 지나치게 한다. 인간이 직립보행을 시작한 지는 약 6백만년이 되었지만 다리와 발을 멈춘 채로 이동하게 된 것은 그에 비하면 극히 최근의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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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11월1일자 235호
 
김익주박사
•문화재청국립해양유물
전시관( 1 9 8 6 ~ 2 0 0 4 )
•現한국문화재보존과학회이사
•경담문화재보존연구소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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