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양 최대의 합판 메이커였던 동명목재는 1980년 5월8일 문을 닫게 된다.

그동안의 경영적자를 은행 수혈로 메워오던 동명목재는 은행이 ‘회복 불능’ 판정을 내리고 추가지원을 중단하자 원목 살 돈이 없어 휴업이라는 비상대책을 쓴 것이다.

은행이 마음을 돌려 구제금융을 내지 않는 한 휴업은 장기화될 수밖에 없었다. 동명의 주거래 은행인 제일은행은 이미 1년 전부터 은밀히 채권확보에 착수한 상태였다. 동명을 포기하더라도 현 단계에서 몇 십억 원선인 은행의 결손이 더 커지기 전에 발을 뺀다는 것이었다. 만약 동명의 은행 빚이 훨씬 더 많았더라면 은행이 울며 겨자먹기로 돈을 계속 대지 않을 수 없었을 테고 동명도 문을 닫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1925년 부산시 동구 좌천동 67번지 150여 평의 창고건물에서 제재소로 출발, 6400명의 종업원과 5개 계열기업을 거느린 그룹으로 부상한 동명목재상사가 도산 상태에 빠진 것은 ▲원목가격 폭등▲무리한 계열기업 확장▲폐쇄적인 개인기업으로 인한 과다조세▲사회사업 지원 등 기업활동 이외의 자금 지출▲2세 경영으로 인한 경영간부와의 불화 등이 원인으로 지적되고 있다. 동명은 합판에서 시작해 페인트, 해운, 건설, 중공업, 식품 등 5개 계열기업을 거느리고 있었는데 이들이 하나같이 부실화돼 동명목재의 발목을 잡아당기는 요인이 되기도 했다. 당시 동명 그룹의 부채는 동명목재상사가 6백억 원, 동명산업이 140억 원, 동명중공업이 100억 원, 동명식품이 80억 원 등으로 재기불능 상태였다.

게다가 동명목재는 법인이 아닌, 창업주 강석진 씨의 개인기업이어서 기업규모 확대에 경영이 따라 가질 못했을 뿐 아니라 세금도 많이 냈다. 타 기업에 인수시키기도 어렵게 되어 있었다. 개인기업이라 강석진 씨가 양도세만 200억 원이나 물어야 했기 때문이다. 또한 경기가 좋을 때 번 돈을 내부축적하지 않고 동명문화학원, 동명불원 등 사회사업지원에 112억 원가량을 기부한 것도 경영부실을 가속시켰다.

설상가상으로 창업주 2세인 강정남 씨(당시 40세)가 1979년6월14일부터 1980년2월24일까지 동명목재 사장으로 있던 8개월 동안 월 50억 원의 부채가 발생해 170억 원이던 부채가 6백 억 원으로 늘어났다. 강석진 씨는 253억 원의 구제금융 지원을 정부에 호소했으나 거부당했고 원목 재고마저 7일부로 바닥이 나자 휴업이라는 최후 결정을 내린 것이다.
 

저작권자 © 한국목재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