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병길 대표이사
온돌마루의 효시. 온돌마루 개발을 위해 과감한 투자와 연구를 아끼지 않은 기업. 높은 수준의 브랜드 네이밍과 대규모 전시참가 및 전폭적인 홍보를 통해 황무지에서 시장을 창조해 성공한 기업. ‘유니마루’를 생산하는 한국종합목재 최병길 대표를 인터뷰했다.
 

어릴 적 기억나는 일은?
“할아버지와 할머님과 함께 충남 부여에서 살았어요. 초등학교 1학년 때 예방주사를 맞아 덧나서 곪은 부분을 긁어낼 때 너무 아파 견디기 힘들었는데 할머니가 업고서 오징어 사준다고 달래는 기억이 납니다. 또 할머니가 흰 속치마를 물들여 운동회 때 입을 반바지를 해준 기억도 납니다.”

87년 작고하신 부친에 대한 기억은?
“87년 아버님께서 돌아가시고 난 후 사업이 어려울 때마다 생각이 났어요. 아버님이라면 이 상황에서 어떻게 하셨을까 하는 생각을 많이 했습니다. 또 인간관계에서 스트레스를 많이 받을 때에도, 제 자식이 커갈수록 생각이 많이 납니다. 아버님은 엄하시지 않았고 그렇다고 다정다감하시지도 않았습니다. 아버님은 부여에서 경찰공무원을 하셨는데 얼마 안 돼 그만 두시고 서울에 올라와 아시는 분과 동업 형태로 창업을 하셨어요. 아마 강원도 등지에서 벌채된 국산목재를 공급하는 책임을 맡은 것 같습니다. 하시는 사업이 번창해서 서울 당인리 발전소 앞에 무늬목, 제재, 미장, 건구재 생산 공장을 운영했고 김포공장도 운영했어요. 군산에서 합판생산도 10년 정도 했어요. 무늬목 생산을 위해 부산에서 당인리까지 화차로 목재를 운반한 적도 있었지요. 아버님께서 작고하실 때 직원이 400명이 넘었습니다. 아버님 연세 59세 때 간경화 수술 후 회복을 못하고 갑자기 돌아가셨는데 제 나이 그때 32세였습니다. 회사 경영관리보다 생산파트에서 일했던 저는 아버님의 운명으로 조문 받으면서 한편으로 업무를 처리해야 했습니다. 경영을 물려받을 준비가 덜 되다보니 어려움이 많았습니다. 외국에 다녀오면 서류가 산더미처럼 쌓여 화장실도 못갈 정도로 결재를 해야 했습니다. 국내 여건이 좋지 않아 사업성이 떨어지는 부분을 점진적으로 정리해야만 했습니다.”

업무로 세계를 다니셨는데 기억나는 일은?
“웨어하우저에 웨스턴레드시다를 검수하러 갔는데 로트를 풀어서 야드에 펼쳐 놓고 전수 검사를 했습니다. 그 당시 로트를 풀어 검수한다는 자체가 매우 이례적일 때고 감히 요구도 하기 어려운 실정이었죠. 그만큼 그 회사는 아버님과의 신뢰가 깊었다는 방증입니다. 이런 검수방식을 우리가 원하지 않을 때까지 한다고 한 약속을 그들은 끝까지 지켜주었습니다. 또 한 번은 대만에서 티크를 수입하러 갔는데 그 티크를 수입하려면 한국에 와서 신용장을 열어야 했어요. 시간이 급했는데 그 업체에서 이번 한 번은 물건을 먼저 배에 실고 나중에 신용장을 열어도 된다고 해 그렇게 했어요. 그동안 쌓아 온 신뢰가 바탕이 됐습니다. 아버님이 작고했을 때 일본 업체에서 여러 사람이 조문 오셔서 산소까지 동행했었습니다. 답방으로 일본에 갔는데 그 업체 사장 부인이 계속 우셨습니다. 이유를 물었는데 자기가 결혼할 때 부친을 만났다면서 다시 볼 수 없음에 매우 슬프시다더군요. 아직도 기억이 선합니다.”

90년 초 유니마루를 생산하게 된 계기는?
“우연히 일본 다이켄사의 난방용 합판마루를 보게 됐습니다. 그 순간 이걸 해야겠다는 느낌이 강하게 운명처럼 왔어요. 88년 정도 됐는데 온돌마루를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에 우리 직원들을 다이켄사 일을 하는 목수라 둘러대고 생산 공장을 보게도 했고, 일본 전문가에게 거액의 자문료를 내고 온돌마루개발에 나섰습니다. 독일, 이탈리아, 필란드의 최고급 사양의 기계를 사와 고생 끝에 마루라인을 완성했어요. 온돌이 아닌 후로링 생산경험은 꽤 오래됐지만 약 4년 이상의 개발을 통해 93년쯤 시판 온돌마루를 생산했어요. 처음엔 아파트 현장에서 대규모 주문이 오면 납품을 망설이기도 했습니다. 온돌마루의 브랜드 개발을 위해 업계 3위 정도의 디자인 회사에서 지어준 이름이 ‘유니마루’였어요. 94년부터 3년 동안 내리 경향하우징페어에 대규모 전시를 가져 브랜드를 알렸습니다. 당시만 해도 가구가 아닌 목제품의 브랜드를 알린다는 게 매우 생소할 때였어요. 종로 빌딩 옥상에 옥외광고도 했고 야구장 펜스에 광고도 했습니다. 물론 아는 분들의 도움도 컸죠. 광주구장 좌측 펜스에 광고물이 걸렸는데 해태 김봉연을 비롯 타자들이 홈런을 많이 쳐서 유니마루를 알리는 데 다른 광고주보다 많이 덕을 봤습니다. 적당히 하려면 안 한만 못하고 하려면 최고로 하자는 신념 때문에 그랬는지 ‘유니마루’가 건설사에 많이 알려지게 됐습니다.”

대표님에게 목재는 무엇입니까?
“처음엔 부친께서 해왔던 목재사업이라 가업으로의 의무감이 더 컸습니다. 업무로 해외를 자주 다니면서 대부분의 거래처가 도심과 떨어진 시골에 있었는데 거기에서 작은 사무실에 있는 사람들의 순수함과 인간적 면들을 자주 경험하게 됐어요. 도시와는 전혀 다른 정감을 느낍니다. 그래서 목재하면 ‘순수함과 인간적인 면’을 떠올리게 됩니다.”

‘마포문화원장’이 되셨는데 소감은?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고 다양한 얘기를 들으면서 지역문화의 특성을 이해하고 계승 발전시키는 일을 합니다. 문화원이 좁고 예산이 경직돼 하고 싶은 것을 마음대로 할 순 없지만 더 넓은 곳에 터전을 잡으면 다양한 문화강좌를 열 계획입니다. 조금씩 준비하고 있습니다.”
‘새벽꽃’이란 시집을 출간해 화제가 되기도 했는데 지금도 시를 계속 쓰시고 있나요?
“2008년 첫 시집을 냈을 때 생각하면 부끄럽습니다. 무지해서 용기 있었던 게 아닌가 싶습니다. 다시 시집을 내기 어려울 것 같아요. 도저히 용기가 나지 않습니다. 시간이 갈수록 부끄러움이 더 해지고 알면 알수록 시를 쓰는 게 어렵게 느껴집니다.”

목재업에 기여 하고 싶은 게 있다면?
“목재산업은 뿌리가 깊습니다. 목재는 소비적인 측면에서 보자면 단순한 건축재나 가구재가 아니라 디자인이 가미된 수준 높은 제품이 돼야 합니다. 소비량보다는 소비의 질적 수준을 높여야 합니다. 그런 차원에서 목재디자인 전시회를 후원하는 시스템에 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한옥에도 관심이 많은 데 목재업계가 한옥보급에 적극성을 띠어야 하고 개발에 힘을 모아야 합니다. 넓게 보면 ‘문화’라는 개념에서 소비가 이뤄져야 합니다. 민간주도의 목재박물관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도 목재산업의 메카인 인천에 제재, 합판, 무늬목, 미장 등 오랜 역사를 간직할 수 있는 장소가 필요합니다. 인천시와 협의해 지역의 역사를 담는 콘텐츠가 있어야 합니다. 목재회관을 지어서 전시해야 합니다. 인천시는 그동안 많은 목재기업으로부터 세금을 거뒀지 않습니까? 우리도 오래 전에 사용한 무늬목 깍는 기계를 버리지 않고 간직하고 있습니다. 더 사라지기 전에 전시할 곳을 마련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최병길 대표이사 경력
1955년 충남 부여 태생
중앙대 정경대학 정치외교학교 졸
연세대 경영대학원 최고경영자과정 수료
2001년 대통령 표창
현 옥산실업(주) 대표이사
현 한국종합목재(주) 대표이사
현 마포문화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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