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0~70년대 합판 업계가 미국 수출로 인해 호황을 누리던 시절, 제재업계도 삼미사, 신흥목재 등이 제재목의 일본 수출로 호황을 누리던 시절이 있었다. 그러나 일반 제재소들은 합판 회사에서 판매하는 합판부적재, 또는 박심을 구입해서 제재하는 등 원재료에 대한 여러가지 문제점을 가지고 있었고, 그 해결을 위한 협회의 노력도 계속됐다. 당시의 문제점은 어떠한 것들이 있었고 그 해결 노력은 어떠했는지 기록을 통해 알아본다.

1. 협회 추천 따라 뉴송 원목 배정
1960년대 말부터 1970년대 초, 미송 원목은 제재목으로 만들어져 주로 수출됐고 뉴송 원목은 국내용 제재목으로 인기를 끌고 있었다. 당시 뉴송 원목은 한림통상(사장 박률선)이 독점 수입권을 갖고 연간 10만㎥를 수입했다. 뿐만 아니라 한림통상은 국내 판매까지 독점을 했다. 이에 대해 대한제재협회는 한림통상이 국내 판매를 할 때 협회 추천에 따라 배정해 줄 것을 주장했다. 그 이유로 한림통상이 국내 판매를 할 때 중간상을 끼고 판매하고 있어 실수요자 가격이 높아진다는 것을 예로 들었다. 국내 제재목 가격 안정을 기하기 위해서는 전국 제재소 실태에 밝은 협회가 도입된 양과 제재소들의 시설을 감안해 안배해야만 가격 안정은 물론 출하량을 균일화해 부정임산물이 나돌지 않게 할 수 있다는 이유도 들었다. 더욱이 뉴질랜드송은 라왕이나 미송보다 값이 저렴해 건축용재로써 그 수요량이 급격히 증가하고 있었는데, 대도시에 있는 제재소에만 집중 공급되고 있고, 지방에 있는 제재소는 공급을 받지 못해 부정임산물이 속출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 주장은 1969년 12월부터 실제로 받아들여져 대한제재협회는 한림통상이 수입한 뉴송 원목을 제재소의 시설규모에 따라 안배했다.

2. 뉴송 원목 계획량의 10%만 수입돼
1969년 뉴송 원목 수입량이 당초 계획했던 10만㎥의 10%에 불과한 1만1500㎥만이 수입돼 제재업계에 심각한 원료난이 야기됐다. 그동안 독점권을 갖고 뉴송 원목 도입을 추진해 온 한림통상이 당초 연 내 10만㎥를 수입하기로 했으나 실제로는 계획량의 10%밖에 수입하지 못했고, 그 중 5% 정도는 제재목으로 수입됐고 시기적으로도 6개월이나 늦은 연말에 수입돼 제재업계는 원재료 공급에 큰 차질을 빚었다. 한림통상은 이에 대해 산지가 우기로 인해 벌목 작업을 제대로 하지 못해 공급량이 부족한 상태였고, 선박 준비도 늦어져 이런 사태가 벌어졌다고 해명했다. 이에 따라 대한제재협회는 공급량 부족에서 오는 가격앙등을 막기 위해 회원사들의 시설 규모를 대(100마력 이상 시설), 중(40~100마력), 소(40마력 이하)로 구분하고 대형제재소에는 15만재, 중형제재소에는 9만재, 소형제재소에는 3만재씩 안배했다.

3. 각종 원목, 도심 주간 수송 금지 조치
1969년까지만 해도 서울의 청량리, 답십리, 왕십리 등 도심 지역에 제재소가 많았다. 1969년 12월 서울시는 서울 시내 교통난을 해소키 위해 원목 수송 차량의 도심지역 주간 운행을 중지토록 했다. 이에 서울 시내에 있는 많은 제재소들이 원목을 적기에 도착시키지 못하는 문제가 발생할 수 밖에 없었다. 이런 현상은 건자재 시즌이 시작되는 연초에 제재목 공급 차질로 목재값 앙등을 야기시켰다. 이에 대해 대한제재협회는 실제로 야간작업이 어렵고 원재료 적기 확보를 못해 생산량이 저하돼 건설 산업용 목재 공급 부진으로 인한 목재가격이 인상될 것을 지적하면서, ‘러시아워’만 피하고 주간에도 원목 수송을 할 수 있도록 완화시켜줄 것을 당국에 건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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