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아미가구를 품은 신흥목재
서울 청량리 제기동에서 조그마한 제재공장으로 출발한 신흥목재(대표 이훈돈)는 일본으로 라왕판재와 미송 제재목을 수출해 번 돈으로 ‘우아미가구’라는 가구회사를 설립했다. 가구회사를 운영하면서 합판 구매가 어려워지자 신흥목재는 합판 공장을 세웠고, 원목 구매도 힘들어지자 인도네시아에 ‘아주임업’이라는 원목 개발회사까지 설립했다. 2001년 폐업해 지금은 역사속으로 사라져버린 신흥목재이지만 우리의 기억속에 ‘우아미(優雅美)’라는 브랜드 이름은 아직도 기억되고 있다.

● 신흥목재 이훈돈 회장
신흥목재 이훈돈 회장(호적상 1918년 3월 18일生으로 나와있지만 실제로는 1923년生)은 평안북도 의주 출신으로 신의주보통학교와 신의주상업고등학교를 나왔다. 고등학교 졸업 후 압록강에서 뗏목 운반일에 종사하면서 목재에 관심을 가지게 된 이 회장은 6·25 사변이 일어나자 남한으로 내려왔다. 피난민 신세로 여러 장사를 해오다가 신흥연와(벽돌공장)를 지인과 함께 동업을 시작했고, 1962년 10월 청량리에 자본금 12억 원으로 ‘신흥목재’ 라는 제재소를 차렸다. 그 무렵 신창건설이라는 회사도 차렸는데, 마포아파트(1964년 완공)와 이문동 단독주택단지 조성에도 참가했고, 세운상가(1968년 완공)도 건설했다. 그 후 1973년 제재소를 인천 도화동으로 옮긴 뒤부터 신흥목재의 황금기가 시작됐다.

삼미사(三美社)는 미송 제재목을 주로 일본으로 수출했으나 신흥목재는 라왕판재를 주로 일본으로 수출했다. 신흥목재의 인천 제재공장은 1~3공장 등 3개의 제재공장이 있었는데 1공장과 2공장은 라왕판재를 키는 공장이였고 3공장은 미송제재목을 키는 공장이였다.

공장마다 2개 라인이 있었고 1개 라인에 벤드소우(bandsaw)가 7대 씩 있었고 모두 42개의 벤드소우가 주야로 가동했다.

1974년에는 매출액 46억8000만 원을 달성했고 1975년에는 74억4700만 원, 1976년에는 104억8600만 원으로 3년간 연평균 40%를 신장했다. 1976년 기준 수출과 내수비율은 51:49로 수출이 조금 더 많았고 주요 수출국은 일본과 미국이었다. 가공판매와 원목판매비율은 65:35로 가공판매가 훨씬 많았다.

1976년 신흥목재의 제재사업이 정점(peak)일 때 신흥목재 제재공장장은 한상욱 씨(서울대 농대, 남방개발 출신, 필자와는 동기동창)였다.

신흥목재는 원목 판매도 많이 했는데 1974년 인천 남구 도화동 40번지에 내수용 원목 자가보세장치장 특허를 인천세관으로부터 받았다. 그 전까지는 동화개발 저목장에 입고해 통관을 하고 다시 공장으로 운반해야했던 불편함이 있었지만 자가보세장치장에서 바로 통관하고 판매도 했다. 신흥목재 이훈돈 사장은 임직원들과 회식도 자주했는데 주로 신포동에 있는 경인식당을 자주 갔고 불고기와 평양냉면을 좋아했었다.

성격은 털털한데다 술을 잘마시는 등 식성이 좋았다. 호남형으로 얼굴이 좀 넓적한 편이고 허스키한 목소리에 목소리는 좀 큰 편이었다.

키는 165㎝정도로 그리 큰 키는 아니었고 어깨를 좀 구부리고 걸었다. 슬하에 아들 하나를 뒀고(이재숙, 1956년生), 현재는 경동시장(주)을 상속받아 운영하고 있다. 현재 이훈돈 회장 본인은 90세 나이로 요양원에서 요양 중에 있다. 한참 회사가 잘 나갈때는 보너스로 600%를 지급했고 1977년에는 본인 사재 3천만 원을 기탁해 신흥장학회를 설립했고 종업원 자녀 342명에게 540만 원의 장학금을 지급했다. 또 1978년에는 2인 이상의 자녀가 재학중인 종업원에게는 분기별로 납부금 전액을 지급하는가 하면 종업원 자녀 217명에게 560만 원의 장학금을 지급하기도 했다.
<다음호에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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