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서합판 김교화 대표
지독히 불운한 가족사를 극복하고 합판유통 1세대의 대부라 불릴만큼 성공했다. 그러다 IMF 직전 잘못 판단한 투자로 재산 대부분을 잃었던 남자. 합판유통사업과 해외제조사업을 통해 롤러코스터처럼 천당과 지옥의 영욕을 맛봤던 남자. 말주변이 없고 흔한 처세술도 녹록치않아 쩔쩔 매던 그가 35년 전부터 제 손으로 일궈 장안의 화제가 된 ‘쇠꼴마을’은 그의 인생역정이 짙게 베여있는 서사시 그 자체다. 아무리 많은 돈을 벌어도 남은 인생을 어떻게 살 것이냐 물으면 누구나 고심하기 마련이다. 그도 마찬가지였다. 그의 선택은 스토리가 있는 생태체험교육장 ‘쇠꼴마을’을 조성하는 것이었다. 35년 전 600여 평의 작은 목장에서 시작해 7만 여 평의 생태체험교육장 ‘쇠꼴마을’은 그의 혼이 없으면 불가능해 보였다. 겉모습보다 내재된 진실과 진정성이 묻어나는 김교화 대표의 ‘혼의 역사’가 완성돼가는 현장에서 작업복을 입은 채로 무더위에 아랑곳 하지 않고 허심탄회하게 인터뷰 했다.

여기 쇠꼴마을은 촌장님의 강한 의지의 냄새가 묻어 나 네요.
벌써 35년 됐어요. 많은 시간이 흘렀죠. 처음에 병에 시달리는 동생을 위해 작은 목장을 만들어 주려고 했어요. 600평을 매입해 시작했고, 그러다 조금씩 땅을 매입해서 밤나무도 심고 배나무도 심고 연못을 만들고 생태길과 박물관, 그네와 농촌체험장, 숙박시설, 숯가마 등 일일이 제 손을 거쳐 지었어요. 불모지 자갈밭과 천수답을 피와 땀으로 가꿔 생태체험공원을 조성하고 있어요. 제 혼을 심고 있습니다.

지금 만족하시나요?
아니요. 처음부터 몇 년간은 이런 테마파크에 전문지식이나 경험이 없어 시행착오를 너무 많이 겪었어요. 그러나 농업수산대와 농협대학교를 다니면서 눈을 뜨게 됐습니다. 스토리가 있어야 한다. 메인 테마가 있어야 한다. 조경은 이렇게 하는 것이다 등을 배우게 됐습니다. 아는 만큼 해야 할 일이 많아 졌어요.

왜 쇠꼴마을을 조성하게 됐나요?
무언가 남기고 싶었습니다. 쉽게 소멸되지 않고 계속 죽을 때까지 노력할 수 있는 무엇을 하고 싶었어요. 합판유통사업을 할 때 부를 축적한 여러 지인들이 여생을 편안히 보내기 위해 건물을 사거나 이민을 가거나 하는 게 대세였지만 난 그게 맘에 들지 않았어요. 오히려 쇠꼴마을을 조성해 나가는 것이 내 성격에 딱 맞습니다. 처음부터 조성하고자 큰 뜻을 품은 것은 아니지만 여러가지 이유로 정성을 쏟고 지금은 혼을 남기고자 노력하고 있습니다.

여러 가지 이유란?
7남매 가족이 있었지만 말로 다하기 어려운 불행한 세월을 보냈어요. 어머니께서 그 모든 어려움을 견뎌 오셨지만 제명을 다하지 못하고 비극적으로 운명하셨습니다. 제가 잘 되는 것을 보지 못했어요. 불효한 자식으로 어머니를 기리는 마음을 이 쇠꼴마을에 담았습니다. 저의 불효를 이 쇠꼴마을을 조성하는 것으로 대신하고 땅에 묻히신 어머니의 영혼을 깨워 기쁘게 해드리고 싶었습니다.

한 때 합판유통사업으로 크게 성공하셨는데
어렸을 때 집안형편이 어려워 외삼촌댁에서 학교를 다녔습니다. 상고를 졸업하고 외대를 중퇴하고 외삼촌이 하시던 합판유통회사에서 경리일을 했어요. 그땐 제가 말을 더듬어서 물건을 사러온 사람과 대화조차 힘들 때였습니다. 그러나 저녁이 되면 저 혼자 매장을 지켰는데 늦게 매장으로 오는 손님과 물건에 대해 얘기할 수 있는 기회가 생겼고 그게 자꾸 늘면서 판매에 관심을 갖게 됐어요. 그러다 도매 업무를 해보게 됐습니다.

언제부터 사업을 하게 됐나요
74년에 잠원동에 동서합판을 냈어요. 68년에 합판유통에 일을 한 지 6년 만에 독립했어요. 반포터미널 옆 공터에 땅을 파서 반지하 사무실을 내고 공터에 물건을 쌓아 놓았지요. 위치가 좋아서 그런지 을지로에 가려던 손님들이 저희 매장에도 와 보는 일이 많아졌어요. 장사가 잘 됐지요.

젊었을 때 큰 돈을 사기 당했다고
동서합판 내기 전 일이에요. 내 인생을 바꾼 계기가 된 사건이었지요. 당시 광명목재의 합판을 사기 매우 어려운 때였어요. 합판을 사러 부산에 갔었는데 거기서 한 사람을 만났지요. 그가 합판을 구해주겠다고 장담했어요. 그는 멸공의거단 단체 간부였는데 500만 원을 선입금 하자마자 바로 튀었어요. 그 사람 옷의 표찰 하나 믿고 보낸 돈이지요. 전 재산을 날린 셈이지요. 집 9채에 해당한 거금이었어요. 저도 선입금 받은 돈이라 그 돈을 보내준 두 분의 사장님께 사정을 설명하고 처분을 기다렸어요. 다행히 그 해 다 갚았어요. 당시는 정말 죽고 싶었습니다. 이 사건은 오히려 제게 좋은 영향을 주었습니다. “김교화는 신용이 있는 사람이다”라고 업계에 알려지게 됐어요.

사업을 번창하게 된 계기는?
제가 광명목재 공장장을 우연히 알게 됐는데 그 분이 선경합판 사장으로 가 있는 것이었어요. 그 분이 전화를 걸어와 해외로 수출한 제품이 클레임이 걸려 창고에 쌓였는데 처리를 부탁한 것입니다. 국내제조사로부터 합판 구매가 용이치 않을 때여서 제가 많은 힘이 됐어요. 시간이 지나서는 제가 원하는 품질과 사이즈를 생산해 주었어요. 선경합판의 생산량의 2/3를 소화할 만큼 많은 양을 도매로 판매했었지요. 그 당시 유통하는 사람의 신분으로 해외 벌채현장에 갔었던 기억이 납니다. 유례가 없었던 일이었지요. 이후엔 코어합판을 개발해서 전국적으로 히트 쳤지요. 이후 인도네시아 특수합판 공장 투자도 순조로워서 황금기를 지냈다고 봐요.

언제 어려워 졌나요?
파주 금촌 용택에 2만 7천여 평 부지에 12개 라인 아치형 문틀을 만드는 동서프리폼이란 공장을 지었는데 투자타임이 빨랐어요. 많은 자금이 들어갔어요. 또 인도네시아 현지에 투자한 공장도 뜻대로 안 됐어요. 그러다 IMF를 만났지요. 환차손과 판매부진에 큰 시련을 겪었습니다. 결국 투자한 용택 동서프리폼 공장 시설과 부지를 순차적으로 팔아서 부도를 내지 않고 해결했지만 타격은 크게 입었지요.

이제는 합판유통 업무를 하지 않나요?
제 큰 아들이 합판유통 사업을 하고 있어요. 제가 있을 때부터 있던 사원들이 아직 있어 둘러보는 것 말고 할 일이 없지요.

앞으로 쇠꼴마을은 어떻게 할 것인가요?
얼마 전 대학에서 4시간동안 저의 경험과 일을 토대로 강의를 한 적 있어요. 큰 박수를 받았지요. 보람이 느껴지더군요. 쇠꼴마을은 다양한 문화행사도 하고 있습니다. 쇠꼴마을은 더 좋은 환경의 생태체험교육장으로 가꿔나갈 것입니다. 또한 귀농귀촌 교육장으로 키워가고 싶습니다. 지금은 둘레길과 전망대길을 조성해 인접한 곳에 캠핑장을 조성하고 있습니다. 저의 소망은 쇠꼴마을을 외국의 유명한 테마파크처럼 가꾸어 나가는 것입니다. 이곳에 오면 제 혼이 느껴지도록 계속 노력하겠습니다.

○ 동서합판 김교화 대표 이력
   덕수상고 졸 / 외국어대학교 중퇴
   동서합판 대표 / 쇠꼴마을 촌장
   농림수산부장관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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