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재산업의 근간을 마련했던 목재 기업 1세대들은 6.25를 전후해 제재소를 운영하던 때가 있었다. 보릿고개가 가시지 않았던 그 당시를 어렵게 지나고 난 후 우리나라 국민소득도 높아지고 더불어 제재 산업도 날로 발전했다. 업계 관계자에 따르면 그 당시 전국에 2500여 개의 제재소가 있었는데 이제는 발전의 단계를 지나 현재 한국목재신문이 추산한 제재소는 전국에 약 600여개가 있는 것으로 조사됐다.

국어사전에 제재(sawing)란 ‘베어낸 나무로 각목이나 판자를 만드는 일’이라고 나와 있다. 제재소(sawmill)는 ‘베어낸 나무로 재목을 만드는 곳’이라고 돼 있다. 제재는 아주 오래전부터 있었고 그 시대를 거쳐 지금의 목재 산업 기틀이 마련됐다.

우리나라에서 동력을 이용한 제재기로 제재를 한 것은 국권침탈을 전후로 생겨난 일본인들이 운영했던 제재소들이라고 추정되고 있다.

당시 일본인들은 우리나라 목재를 일본으로 가져가기 위해 관영(官營)제재소를 주로 이북지역에 많이 만들었고 일본 민간인들도 우리나라에 제재소를 많이 세웠다.

이에 전라도, 인천, 군산에는 제재소가 많이 있다. 인천만 해도 원창, 가가담목재, 대명목재, 신대림제재소 등 인천은 목재를 통해 발전한 항구도시로써 원목을 들여와 제재 후 각 산업으로 쓰이는 제재목을 생산한다.

지금까지 인천은 국내에서 가장 거대한 시장을 갖춘 목재산업의 메카로 불리고 있다.

근대 산업화 시대에도 우세한 항구입지를 발판으로 동남아, 북미, 남미의 원목을 수입해 합판과 가구를 제조하는 곳으로 제품을 가공해 납품하고 있다.

‘인천의 도시 발전사(史)가 한국의 목재 산업사(史)’와 같다고 봐도 틀린말이 아니다. 그래서 목재 산업의 후퇴는 인천의 후퇴를 말하는 것이 어찌보면 당연한 말 일지 모른다.

인천의 원창 이운욱 대표는 “과거에는 공급과 수요가 밸런스가 맞아서 공급이 적으면 수요도 적고 공급이 많으면 수요도 많았다. 하지만 최근에는 공급은 더 늘었고 수요는 적어졌다. 러시아재만 보더라도 ‘갱빵’이라고 건조목 판재 같은것이 들어오는데 소재가 다양하게 가공돼 들어오는 만큼 공급을 부추긴다”며 “산업이 경기 흐름을 많이 타지만 제재소는 한국 목재 산업의 역사 한 가운데에 있다”고 전했다.

또한 가가담목재 이경석 대표는 “제재소가 목재 산업의 근간이라고 할 수 있다”라며 “경기가 좋지 않아 과거보다 많은 물량은 취급하지 못해도 다품종 소량생산으로 품목을 다변화하고 있기에 제재소의 미래를 내다보고 경쟁력을 갖췄다”고 전했다.

또 신대림제재소 이명옥 대표는 “산업이 갈수록 축소되고 있지만 목재만은 꾸준하게 성장하는 것을 보면 희망이 있다. 제재소를 중심으로 제재 산업도 앞으로 계속 커 갈 수 있다고 생각한다”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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