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년전, 우리네 원목 수입은 당시 대기업(삼미사, 효성, 대우 등)의 몫이었다고 한다. 어쩌면 승승장구하던 대기업의 유통품이자 전유물을 당차게 침범한 젊은이가 있었다. 그는 현재 대전과 충북의 한 목조건축자재의 대표이다. 이번호에서는 그 이야기의 주인공인 한림의 최정상 대표를 만나 그의 옛 이야기에 귀 기울여 보는 시간으로 꾸몄다.

라디에타파인을 알리다
최정상 대표는 우리나라에 라디에타파인 원목을 공급한 1세대 중의 한 사람이다. 당시 소남목재의 안승룡 대표와 현재 민주당 유인태 국회의원과 함께 뉴질랜드 파인을 국내에 들여왔다.
최정상 대표는 “회사가 안정세를 갖출 수 있었던건 쌍용으로부터 국내 비수도권 지역의 총판권을 가지게 돼 원목을 공급하기에 좋은 상황이었고, 대전과 충북, 전라도 광주지역에 법인을 3개 운영하며 가능한 다품목을 확보해 시장에 공급하면서 경쟁력을 갖추게 되었다”고 설명했다.

시작은 삼미사에서
최정상 대표는 삼미사 출신이다. 삼미사에서 영업을 처음으로 시작했고, 당시 사원 직급임에도 대전에 영업소장을 맡으며 뛰어난 성과를 기록하며 주목을 받았다고 한다.
최 대표는 “83~84년경이었을 거다. 대기업의 고도성장 후유증 때문에 삼미사도 당시 지방 영업소를 인천과 부산으로 통폐합시켰고, 그 시기에 삼미사에 사표를 제출했는데 사측에서 수표는 수리해주지 않은채 오히려 업무를 맡겨와 그런 상황에서 5개월간 영업을 하기도 했었다”고 웃음지으며 당시 상황을 설명했다.

1984년, 2달 동안 7년치의 돈을 벌다
삼미사를 나온 뒤 점차 어려워지는 경제상황 속에 대기업의 기득권행세는 더욱 심했다고 한다. 하지만 최 대표는 대기업 측의 영업봉쇄를 해 중소기업 입장에서 원목을 팔기 어려웠던 상황 속에서도 1년동안 뉴질랜드 라디에타 파인을 7번선정도 팔며 당시 2달 동안 3700만원의 수익을 벌어들였다고 한다. 최 대표는 “1984년 삼미사를 나올때 내 월급이 46만원이었다. 당시에 46만원이면 부족하지 않은 넉넉한 금액이었다. 하지만 퇴사이후 2달 동안 원목을 직접 판매하며 3700만원을 벌어들였다. 말도 안되는 금액이었다. 금액을 환산해보면 당시 7~8년 일해서 벌었어야할 연봉의 가치였다”고 덧붙였다.

대전에 숲을 일구기 시작하다
최 대표가 이렇게 뛰어난 영업수완을 보이자 오히려 당시 쌍용에서 먼저 찾아왔다. 쌍용은 당시 종합상사였고, 원목 판매에만은 주력할 수 없으니 수도권은 쌍용이 관리하되 최 대표에게는 비수도권 지역을 맡아달라고 했다고 한다. 최 대표는 10평 남짓한 사무실을 얻고, 한밭의 ‘한’자와 수풀림의 ‘림’자를 따서 충청권에 ‘한림’이라는 회사를 설립하게 됐고, 그것이 현재의 한림으로 성장하게 됐다.
그럼에도 최 대표는 아쉬워하는 것이 있었다. 더 큰 회사로 키우지 못한 것에 대한 아쉬움이었다. 한때는 인천에 창고를 마련해 국내 목재시장에 좀 더 적극적으로 제품을 공급해왔지만 현재는 지방에서 업을 하다보니 빠른 대응을 하지 못한다는 대표의 설명도 더해졌다. 최 대표는 “지난해 충북지역의 회사에 방부로를 세웠다. 회사를 더 키우지 못했다는 아쉬움이 남아있다. 아무래도 직접 방부로를 가동하다보니 양질의 제품을 소비자들에게 공급할 수 있게 됐다. 이를 발판으로 다시금 한림을 일으키고 싶다”고 의견을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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