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age_View삼면이 바다로 둘러싸인 우리나라는 일찍부터 조선술이 발달했고 사용재료도 다양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조선재료는 우선 물 속에서 견딜힘이 강하고 가볍고 단단하여 가공이 쉬운 수종이라야 한다. 따라서 참나무나 느티나무 등의 활엽수보다 침엽수가 알맞다. 가장 널리 쓰인 나무는 소나무이다.

실증적인 자료로 안압지에서 나온 통일신라시대의 나무배와 노가 소나무로 만들어졌고 고려 초기의 화물선으로 밝혀진 두 척의 나무배도 역시 소나무로 만들어졌다.

그래서 소나무 보호에 안간힘을 쓴 흔적이 곳곳에 나타나고 있다. 동국이상국집이나 고려사 등에도 소나무 보호에 관한 기록이 있지만 강력한 소나무 보호정책은 조선왕조에 들어서면서 부터이다.

개국과 함께 새로운 궁궐축조와 왜구를 막기 위한 해군력 강화에 군선재(軍船材)로서도 많은 소나무가 필요하게 되었다. 경국대전에는 송목금벌(松木禁伐)이라는 조항으로서 소나무의 벌채를 규제했는데 이는 건축재의 확보보다는 군선 제조에 쓸 나무를 확보하기 위함이었다. 태조실록에는 군선을 늘려야할 필요성을 제기하고 있고 세조실록에는 군선에 쓸 나무가 부족하므로 관가나 양반의 집도 우량 소나무의 사용을 자제하도록 함으로써 한때 군선의 수가 최대에 달하기도 했다.

한편 중종실록을 보면 병선의 수명이 5∼8년에 불과하다 하여 소나무의 공급은 수요를 따르지 못하게 된다. 조선조의 소나무 보호정책은 군선의 제조기법이 낙후되어 수명이 너무 짧고, 화전을 효과적으로 대처하지 못했으며 송정(松政)의 비효율성 등으로 조선말기에 오면서 우리나라의 우량 소나무는 차츰 고갈됐다.

특이한 사실은 완도 앞바다에서 인양된 목선의 배 밑바닥 일부는 비자나무이다. 또 완도군 장좌리 장보고 유적지의 목책(木柵)에도 비자나무를 사용했다. 오늘날 비자나무는 최고급 바둑판의 재료로 알려져 있고 웬만한 굵기의 비자나무는 거의 천연기념물로 지정될 만큼 희귀목인 이 나무가 배를 만드는데 쓰일 만큼 흔했다는 사실이다.

임진왜란 때 만들어진 거북선 선체의 외판(外板)은 소나무로 만들었을 것이나 당파(撞破)라고 하여 소위 박치기를 하는 부분과 힘을 받는 곳에는 녹나무가 사용됐을 것으로 추측된다. 이는 전남 신안 앞바다에 침몰한 중국 송나라 선박의 선체재질조사에서 녹나무의 쓰임새로 추정된 것이며 일본서기의 기록에도 녹나무는 배를 만드는 나무로 소개된 것에서 유추할 수 있다. 단단하기로야 참나무나 가시나무 종류 이상이 없겠으나 물에 견디는 힘이 강하고 인성(靭性)이 우수하여 녹나무를 선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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