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age_View불로장생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인간의 가장 간절한 소망일 것이다. 부족사회가 시작되면서 절대권력자는 내세에 대한 믿음을 갖지 않을 수 없었으며 묘제(墓制)가 발달하여 목관을 사용하기 시작하면서는 자신의 시신을 감싸는 관재에 대하여 특별한 관심이 있었다. 따라서 관재를 만드는데 적합한 나무는 거리의 멀고 가까움에 관계없이 영향력이 미치는 범위의 어디까지라도 운반하여 사용한 흔적을 찾아볼 수 있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관재는 평안남도와 황해도 일대에 분포하는 덧널무덤(木槨墓)에서 나오는 목관이다. BC 108년 한 무제가 위만조선을 멸망시키고 설치한 한사군(漢四郡)의 지배계층은 한나라에서 파견되어 왔다.

일제강점기에 발표한 자료를 보면 이를 실증적으로 증명하듯이 양자강 남부에 자라는 넓은잎삼나무로 만들었다고 한다. 이 수종의 분포지역이 양자강 남부인 점을 들어 낙랑과 중국 남부지방과 활발한 교류가 있었음은 물론 지배계층의 중국과의 관련설을 확인하는 증거로 들고 있다.

우리역사라면 억지로라도 중국의 부속물로 갖다 붙이려는 일본인들의 의도적인 왜곡인지 단순 착오인지는 밝힐 길이 없다. 필자가 중앙박물관에 보관중인 평양 오야리 19호 낙랑고분의 관재를 분석한 결과 넓은잎삼나무는 없고 모두 주목이었다. 두께 25cm, 나비 1.5m, 길이 2m가 넘는 판자에 옻칠을 한 거대한 관재는 오늘날 소백산의 500년 생 주목의 직경이 5∼60cm에 불과한 것을 보면 적어도 천년은 넘은 나무를 사용한 것 같다.

화순 대곡리의 마한 시대의 관재는 이름도 생소한 굴피나무이며 경북 경산 임당리의 원삼국시대 고분에서는 밤나무 관재가 출토되었다. 또 의창 다호리의 초기 가야고분에서는 지름이 1.5m나 되는 상수리나무의 가운데를 구유모양으로 파내고, 그 안에 시신을 안치한 독특한 목관형식이었다. 비중이 거의 0.8이나 되는 상수리나무를 파내기 위해서는 제철기술의 발달없이는 힘들다. 이는 2천년 전 남해안일대에 철기를 다루는 기술이 뛰어났음을 알 수 있는 간접자료이며 최근 대량으로 발굴되고 있는 철정(鐵鋌)에서도 증명되고 있다.

그 외 또 다른 임당고분, 부산 복천동 가야고분, 천마총 등에는 느티나무 관재가 출토되고 있다. 이들은 모두 판자형태이며 지름 1∼2m의 대경재를 사용한 것으로 보아 느티나무 자원이 풍부했고 다른 재료로도 널리 이용되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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