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age_View1971년 7월 6일 공주에서는 해방이후 가장 의미 있는 고고 발굴이라고 알려진 백제 25대 무령왕(501∼523재위)의 왕릉이 도굴의 흔적이 전혀 없이 고스란히 모습을 나타냈다.
역사란 항상 승자의 것이 듯 삼국사기 등 우리의 사서(史書)에는 망해 버린 백제사가 제대로 올라있지 않다.

그래서 자료가 거의 없는 신비의 백제 역사인데, 무령왕릉의 발굴은 백제사 연구에 일대 전기를 마련한 중요한 발굴이 되었다. 수많은 유물 중에는 비교적 깨끗한 상태인 11편의 관재 판이 섞여 있었다.

발굴당시 휘황찬란한 금관이나 옥으로 장식된 다른 유물과는 달리 시꺼먼 옻칠이 되어 있고 으스스하기까지 한 이 유물에 별로 관심이 없었던 탓인지 크기를 측정하고 제작양식을 추정하는 것으로 그만이었다.

20여 년이 지난 91년 어느 날, 필자는 우연한 기회에 이 귀중한 유물이 공주박물관 지하창고에 잠자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충북대 박원규 교수와 함께 분석 작업에 들어갔다. 놀랍게도 관재를 만든 나무는 일본에만 자라는 금송(金松)이었고 일부 나무 조각은 일본 삼나무임을 밝힐 수 있었다.

삼국사기와 일본서기의 기록에서 무령왕은 어릴 때 일본에서 자랐고 다른 어느 임금보다 일본과는 긴밀한 관계가 있었던 임금으로서 당시의 왜(倭)와 교역을 추정할 수 있는 중요한 과학적인 근거를 제시할 수 있었다.

필자로서는 이런 역사적 유물의 재질을 구명했다는 행운에 감사했으나 가장 기본적인 수종분석도 하지 않고 20여 년 잠재워 둔 당국자들의 무관심이 우리나라 문화재 발굴과 보존의 한 단면인 것 같아 씁쓸했다.

불교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던 고려조는 화장습관이 유행했고 일부 왕릉은 주로 북한에 있어서 관재에 대한 자료는 갖고 있지 못하다.

조선왕조에 들어오면서 지름이 큰 우량 목재는 그동안의 산림 파괴로 소나무밖에 남지 않았다.

자연스럽게 관재는 소나무로 쓰였으며 특히 왕실이나 양반들은 우량재질의 소나무를 찾게 되었다. 조선왕조실록에는 재궁(梓宮)이라 하여 임금의 관재에 사용할 나무는 황장목(黃腸木)을 쓰는 것으로 기술되어 있다.

황장이란 소나무의 심재를 부르는 이름으로서 오늘 날 우리가 소나무의 심재를 적갈색으로 보는 것과는 달리 황색 빛이 강하다고 보아 붙인 이름이다. 이에 반하여 변재는 백변(白邊)이라 한다.

관재는 대체로 불교가 성행하기 이전 시신을 그대로 매장할 때인 삼국시대 이전의 관재는 느티나무, 참나무, 밤나무, 굴피나무 등의 활엽수와 주목, 수입목재인 금송 등의 침엽수를 사용했으나 소나무 관재는 아직까지 발굴되지 않고 있다. 소나무 관재는 조선왕조에 들면서 주로 사용됐고 이는 당시의 산림구성과 깊은 관계가 있다.


발문
91년, 분석작업에 들어간 결과 놀랍게도 무릉왕릉 관재의 수종은 일본에서만 자라는 금송이었다. 1971년에 발견된 왕릉의 관재는 수종분석도 되지 않은 채 20여년동안 지하창고에 잠들어 있었던 것이다. 문화재 발굴과 보존의 한 단면을 보는 것 같아 씁쓸한 마음을 감출 수 없었다.

(연재를 마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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