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창기업(다대포)

100년, 한 세기를 오롯이 외길을 달려 온 기업이 있다. 바로 성창기업이다. 성창기업은 1916년 창업 이래 지난 100년 동안 변하지 않는 기업정신으로 우리나라 현대사와 함께 성장해왔다. 목재산업에 진출한 후 합판, 마루판, 파티클 보드, 포르말린 등을 제조하며 종합목재기업을 향한 외길을 묵묵히 지나왔다.
성공과 좌절을 반복하면서도 나무를 사랑하는 일념으로 한국 목재산업의 대표기업으로 자리 잡았다. 성창기업은 11월 창립 100주년을 맞는다. 대한민국에서 여덟 번째, 부산 지역에서는 최초다. 그 100년의 발자취와 성장동력, 현재와 미래를 들여다본다. 

태동의 시대-세계적인 합판기업의 거대한 뿌리를 내리다  

영주_간판 없는 쌀가게, 영주지역 곡물유통업 새 역사 쓰다
일제강점기인 1916년 경상북도 영주면 성저리에 간판이 없는 미곡상이 문을 열었다. 미곡상은 옆에 정미소를 두고 도정까지 해 좋은 쌀을 그때 그때 팔았다. 그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간판 없는 쌀가게’를 찾았다. 정석주와 정태성 부자는 개점 1년이 돼서야 가게 간판을 내걸었다. ‘대대손손 그 세력이 크게 번창하리라’는 염원을 담은 ‘성창상점’. 이는 우리나라 목재와 합판산업을 이끄는 ‘성창기업’의 모태가 됐다. 이 상점의 주인이 경남지역 최초 100년 기업인 성창기업의 창업주 고 정태성 회장(1899~1986)이다. 정 회장의 부친 정석주 옹(1870~1932)은 어린 시절부터 전국 팔도를 누비던 보부상이었다. 그는 특유의 근면과 성실로 10여 년간 자금을 모았고 영주에 정착해 농업으로 생계를 꾸려나갔다. 당시 영주에 처음 달구지를 들여옴으로써 영농의 혁신을 불러 일으키기도 했다. 해마다 풍작이 이어져 1909년에는 영주 시내로 진출, 영농과 노점 운영을 병행했다. 일제강점기, 일제의 수탈이 극심했지만 정석주 옹과 큰아들 정태성은 농산물 집산지인 영주의 특징을 파악하고 성창상점을 개점해 곡물유통업을 본격화했다. 정석주 옹은 근면‧성실을 바탕으로 새로운 문물을 과감하게 도입해 성창상점을 영주 제1의 미곡상으로 이끌었다. 특히 도정 설비를 도입한 ‘토마간’(정미소), 지주들의 곡물을 보관해주는 ‘양물 보관제도’는 성창상점만의 강점으로 큰 화제가 되며 지역시장 곡물유통업의 흐름을 바꿔놓았다. 당시 열일곱 살이었던 소년 정태성은 아버지를 곁에서 도우면서 ‘근면과 성실함’, ‘도전과 개척정신’, ‘사랑과 자애’를 보고 배웠다. 이러한 기업정신을 통해 두 부자는 영주지역에서 큰 성공을 거두었다.

창업주 만오 정태성 회장

봉화_성창상점에서 성창임업으로, 한국 목재산업의 시초를 열다 
성창상점은 1927년, 당시 영주보다 큰 시장이었던 인근 봉화로 본점을 옮겼다. 이때 동생 태복이 합류하고 종업원 100여 명 규모의 대형 정미소를 인수해 사세를 확장했다. 성창상점의 사세 확장은 정씨 부자의 토지 매입에서 정점을 달했다. 봉화 지역의 신흥 지주가 된 것이다. 특히 대규모 농지 매입을 계기로 큰아들 정태성이 성창상점을 독자적으로 경영하기 시작했다. 부친은 농업에만 전념해 대규모 농지를 옥토로 만들어 대량으로 벼를 수확했다. 아버지 정석주 옹은 아들의 더 큰 성공을 보지 못하고 1932년 12월 17일 눈을 감았다. 정태성의 성창상점은 삼척탄광의 미곡 납품권을 획득해 월 1천여 가마에 이르는 대규모 물량을 공급했다. 이어 1935년에는 갱목을 삼척탄광에 납품하게 되면서 명실상부한 지역기업으로 성장했다. 갱목 납품은 성창기업 100년을 여는 목재업으로 진출하는 계기가 됐다. 성창상점의 미곡‧정미 부문은 1935년 일본의 미곡 통제, 1937년 중일전쟁 발발, 1938년 조선미곡회사법 시행에 따른 극심한 수탈 등으로 영업환경이 악화됐다. 시대 변화를 읽은 정태성은 정미사업을 축소하고 목재업에 주력했다. 먼저 성창제재소를 세운 후 봉화군 소천면의 소백산 자락에 대규모 옥방‧광비 임야를 사들였다. 이를 바탕으로 한 목재 판매업은 삼척탄광에 납품하는 갱목 매출로 번창해갔다. 일제의 미곡 통제로 정미사업을 더 이상 할 수 없게 되자 1937년 봉화지역의 대표적 목재기업 ‘춘양목재’를 인수했다. 이로써 정태성은 육림사업에 대한 꿈과 사명감을 펼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했다.     
1941년 태평양 전쟁의 발발로 창씨개명, 미곡과 목재업 전면 통제, 조선식량영단 등 일제의 억압은 극을 향했다. 그러나 정태성은 기업경영을 포기하지 않고, 1943년 성창상점의 정미소와 제재소를 춘양목재와 합병해 ‘성창임업주식회사’를 설립했다. 영주의 작은 미곡가게로 시작한 성창상점이 ‘성창임업’으로서 본격적인 조림사업에 뛰어드는 순간이었다.     
   
100년 기업의 정신을 유산으로 물려받다  
영주, 봉화, 대구 시기까지 40여 년 동안 성창기업은 창업주 정태성 회장의 기업정신을 바탕으로 시대의 변화를 읽어 변화하는 데 망설이지 않았다. 그 변화 속에서도 성창기업만의 ‘한 우물 한마음’이라는 기업문화는 일관되게 이어져 100년 기업의 가장 큰 뿌리가 됐다. 이러한 기업문화는 부친 정석주 옹으로부터 시작해 만오(晩悟) 정태성 회장이 계승한 창업정신에서 비롯됐다.   
성창상점 시절, 청년 정태성은 일찍이 열 살 어린 나이부터 장사꾼으로 살아온 부친의 기업정신을 고스란히 물려받았다. 무엇보다 박토를 옥토로 만들고 낯선 시장에서 성공을 이끌어낸 ‘근면과 성실함’은 후일 정 회장의 정도경영을 지탱해온 덕목이었다. 또한 ‘도전과 개척정신’은 위기 때마다 새로운 변화를 시도해 목재산업과 합판제조업으로 성창기업을 이끌었다. ‘사랑과 자애’는 기독교 기업으로서 조림과 육영사업을 통해 사회 환원을 독려했다.
특히 정 회장은 선친이 물려준 기업정신 위에 소년시절 꿈꿨던 ‘나무 사랑’ 정신을 더해 성창기업의 사회적 책임경영 가치를 확립했다. 나무로 100년을 이어온 기업으로서 인간과 자연에 대한 가치를 잊지 않고 계승하기 위해 육림사업과 육영사업에 이바지해왔다.
성창기업은 이같은 기업 이념으로 대한민국의 현대사를 관통하면서 세상이 조금 더 나은 방향으로 자랄 수 있도록 버팀목이 되어 왔다.  

1955년 성창기업(우암동 시기)

성장의 시대-한 우물 한 마음으로 세상을 향한 줄기를 뻗다

부산 적기동 시대, 합판산업의 대표 수출기업으로 자리 잡다
1950년대 성창기업은 대구 합판공장을 기반으로 성장 궤도에 진입했다. 그러나 정태성 회장은 현실에 안주하지 않았다. 필리핀 원목 수입을 계기로 저목장 확보와 수입목재 운송이 편리한 임해 지역의 합판공장 건립을 구상 중이었던 것이다. 마침 1955년 6월 성창기업은 부산시 부산진구 적기동 4가 7의 2번지(현 남구 우암동) 지역에 대동산업의 부지였던 2만 3,430㎡를 매입할 수 있었다. 철도 인입선과 대로변에 근접한 임해 지역으로서 당시 성창기업의 합판공장에 가장 적합한 부지였다. 
1956년 12월 말 성창기업은 본사와 합판공장의 이전 과정에서 최신 설비를 도입하며 대규모 양산 체제를 구축했다. 부산공장에서 생산되는 합판은 당시 합판산업의 선진국이었던 일본 제품에 비해 품질 면에서 뒤떨어지지 않았다. 품질과 생산 측면에서 경쟁력을 확보하자 국내 시장에서의 판매액은 자연스럽게 늘었다. 또 당시 선진국이 선호하던 4×8피트 규격의 합판 생산설비를 갖추어 미국, 일본 등에 수출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했다.
수출전담팀을 조직하고 서울사무소를 설치함으로써 성창기업은 생산 체제뿐만 아니라 영업지원 체제를 강화하며 해외 진출에 박차를 가했다. 당시 수출전담팀의 수장인 정해덕 상무가 일본, 유럽은 물론이고 미국을 돌며 수차례 브리핑을 했고 척박한 해외 수출시장을 개척하기 시작했다.  
합판 수출의 첫 신호탄은 1959년 3월 15일 미국의 합판 수입업체인 유에스플라이우드(US Plywood)사와의 수출 계약이었다. 수출 규모는 3만 달러에 불과했지만 성창기업은 국내 최초로 합판제품을 수출한 이래 세계적으로 품질을 인정받으면서 1960년대 국내 합판산업의 해외시장 진출을 이끌었다.
첫 수출 이후 성창기업은 수출 물량이 늘어나면서 수출전담팀을 확대해 1961년 무역부를 신설하고 회사 경영 체제를 수출주도형으로 전환했다. 수출 영업 차원을 벗어나 원자재 수급, 무역 동향, 시장 정보 등을 목적으로 인도네시아, 일본(도쿄), 미국(LA)에 주재원을 파견하며 해외 네트워크도 공고히 했다. 특히 1968년 도쿄 주재사무소를 지점으로 격상시킨 후 수출주도형 정책을 더욱 강화하며 성창기업은 1960년대 대표적인 수출기업 반열에 올랐다. 

1959년 원목 수출 선적

혁신의 시대-100년 기업, 향후 100년 미래를 위한 꽃을 피우다 

부산 다대동 시대의 개막, 위기가 성창을 강하게 키우다
성창기업의 1980년대는 합판수출 시대의 과잉 투자와 2차 석유파동으로 10여 년간의 적자경영 속에서 시작됐다. 1984년 1월 정해린 사장은 최우선 과제로 ‘내실과 안정’을 내걸고 자체적인 경영합리화를 추진하고 1986년 9월 정부의 산업합리화기업으로 지정돼 성창그룹 합판가의 구조조정을 감행했다. 성창기업은 1985년 한국요업을, 1987년 반도목재를 흡수합병하고 선창산업과는 우애경영을 지속하며 합판산업의 위기를 함께 극복해나갔다. 1988년에는 조림 전문기업으로 출범했던 성창임원개발도 합병해 1990년대 초 경영정상화를 완료됐다.
당시 성창기업은 경영정상화를 통해 1995년 9월 정부의 산업합리화기업을 해제하고 기업 내 사업구조 다각화를 도모했다. 흡수합병안 기업들의 기능을 사업부, 계열회사 등으로 확보‧강화하는 전략이었다. 이러한 기업구조 개편과 함께 성창기업은 반도목재의 부지였던 부산시 다대동으로 1987년 5월 본사를 이전하고 합판수출의 전성기였던 30년 적기동 시대를 마감했다.
부산시 다대동은 종합목재기업으로 성장할 성창기업의 성지(聖地)가 될 터였다. 우선 1960년대에 각광받았던 ‘합판마루판’ 제품을 온돌마루판으로 개발해 국내 최초 타이틀을 획득했다. 또 한국요업을 요업사업부로 재편하고 파스텔 타일, 대형 타일, 렉스타일 등을 생산하며 친환경 제품과 기술을 개발하기 시작했다. 성창기업은 합판사업, 조림사업 등 그간의 사업기반을 바탕으로 새로운 기회를 탐색하고 있었던 것이다.

1965년 합판 공장

시련과 기회속 지속가능한 성장 동력을 찾다      
성창기업의 역사는 성공에서 위기로, 위기에서 성공을 오가며 이어졌다. 합판산업의 그림자로부터 벗어나 1990년대 종합목재기업으로 탈바꿈한 성창기업은 1997년 IMF 외환위기를 맞이할 수밖에 없었다. 당시 대부분 산업이나 기업이 그러하듯 목재업계와 성창기업도 급격한 매출액 감소와 함께 적자경영에 시달렸다. 기업의 재무건전성 문제, 원목가격 상승 등 이유로 대부분 목재기업들도 M&A와 빅딜을 진행하거나 문을 닫기 일쑤였다.
1996년부터 적자경영에 접어든 성창기업은 저비용·고효율 정책의 일환으로 1997년 타일, 마루, 보드부문을 전략적 사업화하며 품질 고급화와 고부가가치 전략을 추진했다. 그러나 IMF 관리체제 하에서 성창임원, 렉스타일 공장 등이 구조조정 대상이 됐고 성창기업마저 워크아웃 기업으로 최종 지정됐다. 1998년 10월 워크아웃기업인 성창기업은 타일부문 매각, 부동산 매각 등 과감한 재무구조 개선으로 2002년 12월 말 워크아웃에서 조기 졸업할 수 있었다.
1990년대 후반의 위기와 극복은 성창기업이 또 다른 경영혁신체제로 탈바꿈하는 계기를 마련했다. 당시 경영혁신의 핵심은 전문경영인체제 출범과 경영 이원화였다. 워크아웃 졸업 직후 경영혁신위원회를 구성해 기업 혁신에 나선 결과, 2003년 3월 정해린 사장이 회장으로 취임함으로써 전문경영인체제가 본격화됐다. 또 사업적으로는 타일부문 대신 목재업에 집중하는 방향으로 구조개편을 단행했다. 경영체제를 안정화한 후 성창기업은 1999년부터 2005년까지 온돌마루를 기반으로 한 마루사업에서 성공을 거두며 국내 최대 생산체제를 구축했다. 친환경 마루판을 개발하며 새집증후군의 주원인인 포름할데히드를 제거했다. 이 같은 노력으로 성창기업의 마루판제품은 1999년 KS표기 허가를 취득하고 2004년 친환경 건축자재인증서를 수여받기도 했다. 2006년부터는 하이브리드형 제품을 출시해 품질 고급화와 원가 절감을 꾀했다. 전략사업 중 하나인 보드사업도 2000년대 접어들어 성장세가 두드러졌다. 1990년대 주력했던 파티클보드 대신 MDF사업이 본격화됨에 따라 성창기업도 PB공장 뿐만 아니라 MDF공장을 인수하며 대량 생산체제를 구축했다. 이후 2000년 12월에는 우수 재활용제품 품질인증서인 GR(Good Recycled)마크를 획득했다. 2005년 8월에는 PB부문도 환경마크를 연이어 획득함으로써 성창기업의 환경개선 노력을 헛되지 않게 했다. 합판부문도 2002년에 국내 최초로 온돌마루용 대판을 개발하고 국산재 합판을 시범생산하며 자동차 등 산업용 합판시장에 진출했다. 정해린 회장 취임 후 성창기업의 전문경영인체제는 기업 내실화를 도모하는 한편 각 사업부문을 친환경 관점에서 개발·확대했다. 특히 조림사업에 있어서 정해린 회장은 조림보다 육림 위주로 사업을 재편하고 조림사업을 관광자원으로 활용하는 방안을 모색했다. 성창기업의 기업정신을 계승해 지속가능한 성장기반을 다시 확립하는 움직임을 보였던 것이다.

창업초기 성창상점

백년 기업, 100년 미래의 향기로운 꽃을 피우다 
IMF 외환위기 이후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가 당연히 불어 닥쳤지만 성창기업은 지주회사로 경영체제를 전환하고 비상경영에 돌입했다. 당시 성창기업은 경영 내실화와 사업구조 혁신을 벗어나 시대흐름에 맞는 기업 혁신을 단행했다. 2009년 ‘Green & Clean’ 비전을 정립하고 CI도 새롭게 단장해 기업문화를 전환하고 이미지를 개선하는데 앞장섰다.  2011년 출범한 정연오 부사장의 오너-전문경영체제는 백년기업 위상에 맞는 기업이미지 변신에 역량을 집중했다. 성창기업은 국제회계기준(IFRS)을 도입하고 ERP시스템을 구축해 윤리 경영과 스피드 경영으로 경영체제를 선진화했다. 사업부문도 현대화에 따라 합판부문은 2011년부터 친환경 등급인 E1·E0·SE0제품만을 생산해왔다. 2013년 고급 거푸집합판인 테고합판이 국내 최초로 KS 인증을 획득하고 친환경 인테리어 합판을 개발하며 합판제품의 품질과 제품가치를 한 단계 향상시켰다. 마루부문은 2014년 리우브랜드를 론칭하며 인테리어 서비스에서의 토탈솔루션을 제공하기 시작했다. 보드부문에서 성창기업은 2008년 성창보드를 출범한 후 B2C 유통구조를 통해 친환경 제품을 판매했다. 2010년대의 성창기업은 윤리경영, 스피드경영, 친환경 사업 강화 등 백년기업으로서의 지속가능성을 확보하는데 주력했다고 할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2012년 5월 설립된 지씨테크(GC-Tech)는 성창기업의 재생에너지 자회사로서 비전 ‘Green & Clean’을 실현함과 동시에 친환경 목재산업의 새로운 분야를 개척한 성과이다. 폐목재를 사업화하는 지씨테크는 2013년 베트남 하노이 지사, 2014년 동해물류기지를 개설하며 성창기업의 지속가능한 성장동력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이처럼 성창기업의 100년 역사는 나무와 자연을 사랑하는 기업정신이라는 뿌리로부터, 위기와 시련 속에서도 직원들이 상생하는 ‘한마음’ 기업문화가 세상을 향해 뻗어나가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이를 바탕으로 최고경영자의 위기관리, 지속적인 R&D, 경영혁신과 사업적 도전 등을 멈추지 않았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백년기업 성창의 중요한 비결은 화합경영, 녹색성장, 부산 지역사회와의 상생, 친환경과 동반성장을 통해 지속가능한 미래를 잊지 않고 열망하며 함께 향하는 사람들에 있다. 2016년 11월 20일 100주기를 맞이하는 성창기업이 꿈꾸는 100년 미래가 향기로운 이유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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