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예술종합학교 미술원 건축과 이강민 교수

자연은 한국 문명을 꿰뚫는 가장 중요한 키워드 중 하나이다. 건축을 포함한 한국의 모든 문화는 자연스러움 또는 자연과의 조화를 특징으로 하며, 현대문명은 이와 다르기 때문에 비판을 받는다. 어떤 이는 한국 건축문화의 계승이 자연스러움을 회복하는 일과 다르지 않다고도 한다.
자연스러움은 먼저 자연 재료에서 나왔다. 그러나 자연 재료를 사용한다고 해서 바로 자연스러움이 얻어지는 것은 아니다. 자연 상태의 나무와 돌과 흙의 성질을 사용자가 함께 공감할 수 있어야만 자연스럽다고 할 수 있다. 자연에 있는 것은 서로 의존하고 함께 변해간다. 그것은 홀로 완벽하지 못하고 독립적이지 않으며, 세월이 지나면 색이 바라고 탄력을 잃는다. 나무와 흙은 그래서 자연스러운 건축 재료였다.
자연스러운 집은 자연스러운 사람과 짝을 이루었다. 나이 들어가는 집에서 집주인은 삶을 생각했다. 집을 꾸미는 일을 삶을 수양하는 일로 여겼고, 낡아가는 집을 보며 연륜과 순리를 생각했다. 제각각의 나뭇결과 실금이 간 흙바탕이 서로 협력하여 구실을 해내는 것은 세상사를 떠올리게 했고, 홍수가 나거나 동물이 들어와 망가진 부위를 덧대면서 인생사를 음미했다. 집과 사람은 한 몸이나 다름없었고 집주인의 호는 곧 집의 이름이기도 했다.
그러므로 좋은 집의 요건은 훌륭한 사람의 자격과 마찬가지였다. 사람이 동물이지만 교육과 수련을 통해 한 차원 높은 존재가 된 것처럼 건축은 자연에서 왔지만 인공이 더해져 쓸모와 의미를 만들어냈다.
‘논어’ 옹야(雍也)편의 유명한 문장에 빗대보자면 자연이 인공을 이기면 야(野)하고 인공이 자연을 이기면 사(史)하다. 야하다는 것은 거칠고 촌스럽다는 말이고, 사하다는 것은 닳아 빠졌다는 얘기다. 건축적으로 야한 것은 미완성이고, 사한 것은 매너리즘이다. 따라서 문질빈빈(文質彬彬), 즉 인공과 자연이 서로 빛을 내는 지점을 찾는 일이 핵심과제가 된다.
문제는 그 조화의 지점을 우리가 어떻게 알 수 있느냐 하는 것이다. 사실 자연과의 조화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항상 건축의 큰 주제를 형성해 왔다. 우리 건축만 자연과 조화를 이룬 것이 아니라는 얘기다. 다만 그 지점은 서로 다르다. 음식의 간이 민족마다 조금씩 다르듯이 자연과의 최적의 조화를 감지하는 감각도 다르다. 한국인의 고유한 감각 중 하나는 익살이라고도 하고 해학이라고도 하는 웃음 짓는 순간일 것이다. 휜 나무를 살리느라 주변을 교묘하게 메꾸거나 기둥 밑동을 울퉁불퉁한 돌에 맞추어 돌려 깍은 것을 보면 슬며시 미소를 짓게 된다. 자연이 아니라 인공인 줄 알면서도 짐짓 모른체 해주는 일종의 공범의식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조금만 어긋나도 웃음은 사라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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