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 모습을 그대로 간직한 잇다스페이스

배다리 헌책방 마을을 지나 차이나타운 방향으로 조금 내려오면 주름진 골목 사이로 옛 모습을 그대로 간직한 잇다스페이스가 나온다. 낡은 벽돌, 페인트가 벗겨진 대문의 글씨, 녹슨 자물쇠가 이 공간의 나이를 짐작하게 한다. 
현재 잇다스페이스가 자리하고 있는 이 건물은 다양한 모습으로 그 용도를 달리해왔다. 시작은 소금창고였다. 1920년대 일본은 화약의 원료로 사용하기 위해 소래염전에서 소금을 생산했고, 일부를 이곳에 보관했다고 전해진다. 그 후 1940년대 일본식 여성 사우나로 변신해 목욕탕 건물로 쓰이다가 1950년대 ‘문조사’라는 서점으로 탈바꿈한다. 현재 대문에 남아있는 ‘동양서림’은 표준전과, 동아전과 등 각종 참고서가 유행하던 시기인 1970년대부터 1980년대에 문조사 다음으로 들어선 헌책방이었다. 

잇다스페이스의 대표이자 목공예 작가 정희석

1992년 동양서림이 문을 닫은 후 20여 년 동안 동네 주민들에게 쓰레기 창고로 불리면서 공터로 방치됐고, 2015년 작업실을 찾던 젊은 목공예 작가가 이곳을 발견해 새로운 공간으로 개조했다. 
시간과 공간을 넘나드는 곳. 잇다스페이스는 한 가지로 정의할 수 없는 공간으로 사람들의 발길을 붙잡는다.

낡은 대문을 열고 들어가면 가장 먼저 장작 냄새가 반긴다. 지붕 한 쪽을 일부러 투명으로 만들었을까. 지붕을 뚫고 들어온 햇빛은 난방시설이 따로 없는 공간을 따뜻하게 비춰준다. 중앙에 자리잡은 우드슬랩에 앉아 목공예 작가이자 잇다스페이스 대표 정희석 아티스트의 이야기를 들었다. 

차와 음악, 담소까지 나눌 수 있는 공간

공터에서 문화의 씨앗으로
정작가가 이곳에 처음 왔을 때는 그야말로 암울한 공간이었다. 주변 골목과 내부에는 쓰레기가 뒹굴었고, 사람들이 잘 다니지 않아 스산한 기운마저 감돌았다. 그의 마음을 붙잡은 건 벽면 한쪽에서 홀로 새싹을 피워낸 오동나무였다. 자세히 둘러보니 한쪽에는 태극기도 달려있었다. 그는 이곳에서 희망을 발견했고, 최대한 모습을 바꾸지 않은 채 공간 그대로를 재생시킬 방법을 찾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우드슬랩과 같이 키가 큰 작품들을 보관할 수 있는 개인 작업공간으로 이곳을 찾았지만, 그러기엔 너무 아까웠다. 이 공간의 가치를 다른 사람들과 함께 나누고 싶었다. ‘문화주주 짓다’라는 이름으로 공간 재생을 위한 펀딩을 시작했고, 빠르게 자금을 모을 수 있었다. 
“투자해준 사람 중 70%가 문화예술인입니다. 그동안 작가 활동을 하며 맺은 인연들이 프로젝트를 지지해 주었죠. 잇다스페이스를 하며 다양한 사람들을 만났어요. 제게 잇다스페이스는 사람과 사람을 이어주는 만남의 공간이기도 하죠.”        

'뉴트로1920' 전시

왜 하필 나무인가
정작가는 어려서부터 골동품 모으는 취미가 있었다. 버려진 물건을 수집해 새로운 작품을 만들곤 했다. 손재주가 좋았던 그는 대학에서 식품영양학을 전공하며 요리사의 꿈을 키웠지만, 학문과 실전이 다르다는 것을 깨닫고 고민을 하게 된다. 그러던 중 나무에 빠져 한국가구학교를 운영하는 김석범 선생을 찾아가 기능적인 부분을 익혔다. 그 후 가람가구학교를 운영하는 김성수 교수를 무작정 찾아가 작가로서 갖춰야할 철학을 배웠다. 
“나무는 인간이 움켜쥘 수 있는 재료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자체에서 뿜어져 나오는 따뜻함이 있어요. 또 나무는 어떤 콘텐츠와도 잘 어울립니다. 한계 없이 도전해보고 싶은 분야가 많이 남아있습니다. 항상 염두에 두는 것은 ‘만든다’는 것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겁니다. 만든다는 것에 갇혀있으면 항상 똑같은 것들만 만들게 되죠. 다양한 재료와 나무를 연결해 새로운 예술 활동을 해보고 싶습니다.” 

정희석 작가의 손

아티스트, 정희석
그는 많은 이름으로 불리지만 최근에는 대표와 작가라는 호칭으로 가장 많이 불린다. 그는 단호하게 대표보다는 작가로 불리는 것이 좋다고 밝혔다.  
좋은 작품은 자연에 대한 이해로부터 나온다는 그는 작품을 만들 때 나무의 형태를 파악하는 시간을 갖는다. 옹이나 흠집, 굴곡이 있어도 그대로 살려 작품을 만든다. 나무가 가진 스토리를 전달하기 위해 최소한의 가공만 한다. 
그의 하루는 대부분 작업실에서 시작한다. 별일이 없어도 습관적으로 간다. 작업실에 가서 가장 먼저 하는 것은 나무와 호흡을 맞추는 것이다. 정작가의 작업실에 가면 목재가 모두 세워져 있는 특이한 광경을 볼 수 있다. 대부분은 공간을 효율적으로 사용하기 위해 목재들을 눕혀놓거나 겹쳐서 쌓아놓는데 정작가의 작업실 나무들은 하나같이 사람이 서 있는 모양이다. 그는 이것이 재료와 대화하는 방법이라고 말한다. 
“나무들은 하나하나의 표정이 있습니다. 저는 나무의 결과 형태를 읽으며 나무와 대화를 합니다. 따로 영감을 받는 곳은 없습니다. 어떤 작품이 될지는 이미 나무들이 말하고 있으니까요.”  

정작가의 작업실

찾아오는 사람들
인터뷰 중에도 잇다스페이스를 찾는 사람들이 끊이질 않았다. “편하게 보다 가세요. 원하신다면 갤러리 큐레이션도 들을 수 있습니다.” 
잇다스페이스는 오전 11시부터 오후 5시까지 운영하고 있으며, 하절기에는 1시간 연장해서 개장한다. 매주 월요일에는 휴관이며, 전시마다 큐레이션을 들을 수 있도록 준비해 놨다. 
이곳은 전시장 대관, 목공수업, 갤러리, 영화관 등 다양하게 활용되고 있다. 찾아오는 사람들의 연령대도 다양하다. 특별한 조건이 필요 없는 공간이다. 하지만 딱 한 가지 조건은, 대관 사업을 진행할 때 나무와 관련된 것 또는 나무를 노출할 수 있는 콘텐츠가 있어야 계약을 한다. 형식에 갇히지 않는 자유로운 아티스트지만 그의 예술 철학은 뚜렷하다.
잇다스페이는 자연과 자연, 예술과 사람, 문화와 공간 등 다양한 것들을 ‘잇는’ 공간이다. 갤러리나 전시장으로 부르는 것도 정확한 표현은 아니다. 한마디로 정의하기 어렵고, 하나의 정의에 갇히지 말자는 것이 정작가의 생각이다. 
“위쪽으로 조금만 가면 배다리 헌책방 거리가 나오고, 멀지 않은 곳에 차이나타운도 있습니다. 지역적으로도 교차점에 위치해 서로의 문화를 이어주고 있죠. 앞으로 어떤 것이 이어질지는 저도 모르겠습니다. 오늘처럼 동네 주민들이 부담 없이 찾아와 잇다스페이스에서 시간을 보내는 것만으로도 성공했다고 생각합니다.”

잇다스페이스에서 볼 수 있는 작품들

내일이 기대되는 잇다스페이스
지난 달 열린 첫 정기 기획전 ‘뉴트로1920’은 잇다스페이스가 4년이 되던 해를 기념해 인천 지역의 작가들을 모아 열리게 됐다. 정작가는 그동안 인천에 살면서 지역 작가들과 활발하게 소통을 못 한 것이 아쉬워 이 기획전을 열었다고 전했다. 그의 바람대로 이번 전시는 문화예술 사업에 기여해, 지역 사회에 문화의 씨앗을 뿌리는 계기가 됐다.
정작가는 잇다스페이스가 ‘공유’의 공간이 되길 바란다고 말을 이었다. 실제로 그는 꾸준히 후배들과 소통하며 작품 활동을 하고, 문화예술 프로젝트를 통해 지역사회를 알린다. 최근에는 나무에 관한 인문학 강의를 하며 그가 가진 철학이나 기술을 공유하는 데 보람을 느낀다. 
“올해의 목표도 작년과 달라진 건 없습니다. 인천지역 사람들이 즐길 수 있는 새로운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싶어요. 인천은 좋은 문화콘텐츠를 가지고 있음에도 문화예술 쪽으로의 발전이 더딥니다. 다른 지역 사람들도 잇다스페이스를 통해 인천 문화를 즐기러 오는 계기가 됐으면 합니다. 또 4년 동안 잇다스페이스에 작품을 전시했던 작가들을 초청해 감사전을 열고 싶습니다. 잇다스페이스를 있게 해준 분들에게 고마움을 표현하는 자리가 됐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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