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재를 가지고 만들 수 있는 건 다 만들겠다”는 포부로 45년을 하루같이 일했다는 홍성명 회장.
94년 명성목재 부도이후 재기를 위해 동터오는 새벽마다 한강을 달리고 또 달렸다는 그가 1년 뒤 재기에 성공해 진성산업에서 황혼의 인생을 불태우고 있다.

 

Image_View목재업은 어떻게 시작했나
형제 많은 집의 장남으로 태어나 고등학교를 중퇴하고 일자리를 찾아 나선게 제재소였다.
한국전쟁이 막 끝나고 어려운 시절이어서 누구든지 돈을 벌어야 했었다. 열일곱에 산판에서 원목 구입 일을 시작했다.
필리핀 나왕이나 미국산 제재목 등 수입일도 도맡아 했다. Image_View늘 내가 사장이라는 마음가짐으로 일하다 보니 이십대 초반에 이미 책임자가 되어버렸다.


 

 

 

젊은 나이에 책임자가 됐는데
책임감 있게 일하다 보니 사장에게 신뢰를 얻게 되었다. 스물네살이 되던 해에 한국합판 전주공장에서 같이 일해보자고 제의가 왔다.
신의를 지키기 위해 일하던 제재소의 사장에게 사실대로 이야기했더니 큰 회사에서 일해보라며 선뜻 허락을 했다.
공장장으로 일하게 되었으나 나이 많은 사람들 위에서 일해야 하는 어려움을 극복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8년동안 근무하면서 생산과 영업을 섭렵했다.


빈손으로 상경했다던데
동화기업에 자리가 있다고 해서 서울로 오게 됐다.
고향에 부모님과 형제들이 남아 있었는데 나만 서울에 가는 것이 죄송스러워 그동안 마련했던 집과 재산을 다 가족들에게 나눠주고 단돈 10만원을 가지고 상경했다.
처자식을 모두 데리고 삭월세부터 서울생활이 시작된 것이다.


상을 많이 탔다고 하던데
삼미사 생산부에 근무할 때였는데 제재목을 일본에 주로 수출했었다.
열심히 일한 덕분인지 기업상도 아닌 개인으로 상공부장관상을 받게 되었다. 후에 대통령상도 받았지만 지금도 그때의 상이 가장 뜻깊고 흐뭇하다.


창업을 하기까지
삼미사에서 10년 가까운 세월을 일했다. 생산만 20년을 해온 것이다. 같이 일하던 전무가 사업을 해보자고 권유했었다.
그동안 일했던 경험도 있고 원목 수입 경력도 나름대로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술담배 안하면서 모은 돈과 퇴직금, 집을 담보로 대출받은 돈으로 어렵게 원우기업이란 회사를 창업했다.
동업을 하던 회사를 제재소만 분리시켜 명성종합목재로 독립하고 본격적인 경영을 시작했다.


명성목재를 꽤 많이 키웠었는데
처음엔 주로 건설자재를 납품했다. 한참 중동건설이 붐이었던 시절이라 수출로 돈을 좀 벌었다. 일본수출도 꾸준히 했다.
목재로 할 수 있는 건 다해보는 것이 포부였기에 제재목만으론 성에 차지 않았다. 다양한 목제품을 손대기 시작했다. 일본에 조립식 주택용 목재를 가공해서 수출하기 시작했다. 가격은 제재목에 비해 훨씬 좋았지만 하급의 원자재와 기계로는 불량율이 너무 많았다. 1년이 지나고 나니 적자가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하지만 밤잠을 못자는 엄청난 노력끝에 1년2개월만에 불량율이 2%이하로 줄어 드는 쾌거가 있었다.


일본업체에서 돈을 가지고 찾아오다니
불량율을 줄이기 위해 피나는 노력을 하던 어느 날 일본의 납품업체에서 신문지에 돈을 싸가지고 날 찾아왔다. 500만엔이 든 뭉치를 건내면서 앞으로 더 많은 물량을 해야 하니까 기계를 구입해서 납품하라는 제의였다. 그렇게 1년동안 납품을 했더니 일본에서 사장이 직접 찾아와 형제처럼 잘 지내자며 격려를 해주었다. 성실하게 일한 보답이었다. 덕분에 연간 500만달러를 수출했다. 공로가 인정되어 대통령상을 받기도 했다.


팔레트 사업은 어떻게
85년에 공장을 크게 확장하는 등 회사가 거듭 발전을 거두었다.
팔레트 사업은 87년부터 시작했는데 일본에서 얻은 아이템이었다. 일본을 여러 번 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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