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밥그릇이 커지면 담을 밥도 많아질 게 아닙니까?”출혈을 감수하면서도 왜 그렇게 처음 시도를 많이 하느냐는 질문에 이렇게 답변하는 박찬규 사장.
업계 최초라는 말은 이미 그 의미를 상실했다며 회사의 이름과 같이 나무는 자연스레 삶의 일부로 받아들이고 있다는 말을 덧붙인다.
장사꾼이 되지 말라는 어머님의 말씀을 신조로 20년을 CEO로 살아오면서 그가 겪은 삶의 이야기가 자못 진지하다.

 

Image_View목재와의 인연은
난 한번도 월급쟁이가 되어본 일이 없다. 늘 남과 다른 삶을 살고 싶었다. 학창시절, 공부엔 취미가 없었지만 조숙하게도 앞으로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에 대해 고민하곤 했다.
“뭘해도 남과다르게 살겠다”는 것이 나의 소신이었고 81년에 형님과 함께 흥일목재를 창업했다. 형님은 조언자이자 파트너이자 가장 존경하는 아버지같은 분이다.


목재를 평생업으로 삼은 계기가 있다면
83년부터 목재인테리어가 유행하기 시작했다. 전국에 자재를 납품하면서 내 평생을 투자해서 해볼만한 사업이란 결심을 굳혔다. 남들은 속여서 돈도 번다지만 정확히 계산해서 원칙대로 파는 것이 지금도 변하지 않는 신념이다.
10개주면 10개값을 받았다. 20년이 지난 지금 나무와삶은 조금 비싸지만 정확하다는 평가를 받고 있고 20년전 거래하던 업체에 아직도 납품을 하고 있다.


관련서적을 많이 보유하고 있다던데
25세가 되던 해 중국대사관 앞에 제일서적에 간 일이 있었다. 목재관련서적을 찾다가 ‘우디’라는 잡지가 눈에 들어왔다. 순간 손끝에 전율이 느껴졌다. 지금도 그 느낌은 잊을 수가 없을 정도로 강한 충격을 받았다.
당시 1만3,000원이라는 거금을 주고 그 잡지를 샀다. 통나무에 관련된 중국잡지였는데 스칸디나비아의 목재가구에 관한 기사가 기억이 난다. 그런 이유로 핀란드에 목재를 사러가기도 했다. 또 한번은 자재를 구입하러온 손님이 목재에 관한 과학적인 질문을 한 일이 있었는데 대답을 하지 못했다.
이론공부를 해야겠다고 결심을 하고 고서점에 가서 목재건조학 책을 샀다. 그렇게 사모은 것들이고 지금은 도서관을 만들라고 권유를 받을 정도로 책이 불어났다.
조만간 누구나 책을 볼 수 있는 공간을 조성해볼 계획이다.


인생을 변화시킨 인물이 있다면
단연코 어머니이다. “장사꾼이 되지 말아라”라는 어머니의 말씀을 가슴에 새기면서 살았다.
돈을 좋아하지 말고 일을 좋아해야 한다며 직장생활을 안해봐서 직원들의 애로사항을 잘 모른다며 항상 마음을 쓰라고 말씀하셨다. 초등학교 시절 혼자 여행을 보내실 만큼 날 강하게 키우셨다.


처음 시도를 많이 하는 기업으로 알려져 있는데
업계 최초로 자재전시장을 가졌고 일반인을 대상으로 목조주택 시공교육을 실시하며 ‘입금 후 출고’라는 시스템을 처음 도입하는 등 업계 최초라는 이름표가 많이 있다.
남들이 왜 그렇게 투자를 많이 하느냐고 묻는다. 대답은 한가지다. 밥그릇이 커지면 많이 담을 수 있다는 것. 같이 살아가기 위해서는 먹을 것도 많아야 하지 않겠는가. 경쟁업체가 생길 때마다 나무와삶이 발전하는 것이라 생각한다.
시도를 많이 하면 실패도 많은 법이다. 시행착오를 가장 많이 겪으면서 성장했기 때문에 많은 수업료를 지불한 대신 튼튼한 뿌리를 가질 수 있었다.


목조주택 시공교육 프로그램은 어떤것인지
자체 직원교육 프로그램이 확대된 것이다. 목조주택의 보급과 시장의 활성화를 위해 일반인을 대상으로 무료교육을 작년 5월부터 시작했다. 이론과 실기를 병행한 6주교육이 실시되며 현재까지 600여명이 수료했다.
일반인들보다는 현업에 종사하고 있는 사람들의 참여율이 더 높았지만 교육을 받고 실제 자기집을 짓고 있는 사람들도 있다. 그럴 때 보람을 느끼며 뭔가 한몫을 해내고 있다는 생각에 마음이 뿌듯하다.


경영을 위한 남다른 노력이 있었다면
재작년까지 회사에 내 책상이 없었다. 아무데나 앉으면 내 책상이 되었다. 책상에 앉아서 할일이 결재하는 것 외에 뭐가 있겠는가.
사장이 하는 일이 직원들과 다르지 않다고 생각했다. 오래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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