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의 대표적인 산업을 말한다면 단연 목재산업이다.
목재가 산업을 주도하던 지난 시절은 듣기만 해도 기분이 절로 좋아진다. 한때 인천 최고의 목재기업으로 자리잡았던 해안실업의 대표이사 이병묵 회장은 일련의 사실을 증명해줄 수 있는 목재산업의 산증이다.
목재 1세대로는 드물게 아직도 현장에서 노익장을 과시하고 있는 살아 있는 목재역사 이병묵 회장을 만났다.

 

Image_View목재와의 인연은 어떻게 시작됐나
인천시청에서 공무원 생활을 한 8년쯤 하다가 61년 에 ‘천일건재’를 창업했다.
한때는 인천의 남동염전이 폐지되면서 31만평을 구입해 3년동안 간척사업을 하기도 했지만 결국 실패하고 2만평의 땅과 교환하는 억울한 일을 겪기도 했다. 나의 성공과 실패의 인생은 그때부터 반복됐다.
벽돌과 기와를 찍고 제재소를 겸하는 건재상을 시작으로 목재와의 인연이 시작됐다.


경영자로서 최고의 순간이 있었다면
해안실업이 목재업계를 주름잡던 시절이다. 그 당시는 목재산업이 최고로 대우받던 시절이었으니까 돈도 많이 벌어 들였다. 한때 인천에서 세금을 제일 많이 내기도 했을 정도니까. 가구직공만 400명이 넘는 통보상사라는 큰 가구회사를 인수해 운영하기도 했을 정도로 해안의 재력은 상당한 수준이었다. 경영자로서 가장 흐뭇했던 기억들이다.

사회사업을 꾼준히 했다고 들었는데
처음 건재상을 시작할 무렵, 제재소를 겸하고 있었기 때문에 울타리가 필요했다.
전쟁직후 다들 살기 어려운 시절이라 땔감으로 도난당하는 목재를 방지하기 위해서 울타리를 치려고 공장을 한바퀴 돌고 있었다. 그때 나의 눈에 들어온 한 사건은 지금껏 나에게 불쌍한 이들을 돕게 하고 있다.
추석전날 판잣집이 즐비한 인천 숭의동의 동네 한켠에서 두부장사와 한 부인이 맨땅을 뒹굴면서 싸우고 있었다. 명절을 지내기 위한 두부를 외상으로 달라는 부인과 그럴 수 없다는 두부장사의 각자의 생존을 위한 싸움이었던 것이다. 두부장사의 망가진 두부를 변상해주고 부인에게 두모 2모를 건내주면서 남을 돕고 살기로 결심했다.
그 이후로 명절 때면 숭의동과 도화동 집집마다 돼지고기 세근과 고무신 한켤레씩을 꼬박 13년동안 돌렸다. 너무 고마워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고 돈이란 이렇게 쓰라고 버는 것이라 생각했다.

 

대의원을 역임했다고 들었는데
오랫동안 사람들은 도운 덕분에 지역에서는 유명인사가 되어 있었다. 돈도 많이 벌었기 때문에 세금도 많이 냈었는데 하루는 정보부에서 날 찾아와 대의원 후보로 나오라고 했다. 처음엔 거절을 했지만 결국 인천에서 최고 득표를 했다.
당시엔 상당히 대우도 받았을 만큼 목재업이 융성했던 시절이 있었다.


해안실업의 위기는 어떻게
난 성공과 실패를 반복하면서 살아왔다.
좋은 날이 있으면 나쁜 날도 있는 법, 이런저런 많은 사업을 손대고 있던 중 오리털제품을 취급하던 스완상사와 교보생명의 인수 제안이 들어 왔다. 당시 보험의 인식이 좋지 못했기 때문에 교보생명의 인수를 포기했다. 대신 스완상사를 선택한 것이 화근이 되어 큰 실패를 경험했다. 사기를 당해 재산을 탕진하고 해안실업이 법정관리에 들어갔다. 믿었던 사람들에게 배신을 당한 일은 돈을 잃는 것보다 더욱 큰 시련이었다.


해안실업 부도 어려움의 극복 방법은?
합판장사로 돈을 가장 많이 벌었는데 한순간의 실수로 해안실업이 부도에 이르렀다. 80년 법정관리이후 회생을 위해 노력했다. 아무리 어려워도 불가능한 것은 없다고 생각했다.
10년만에 법정관리에서 벗어나 자회사인 해안조선을 설립하고 94년엔 시흥조선도 열었다. 그 옛날 해안실업의 명예만큼은 안되겠지만 어려운 회사를 회생시키고 자회사까지 설립했다. 참으로 오랜 세월동안 부단히 노력한 결과라 생각한다.


40년 경영철학은 무엇인지
내 나이 일흔일곱이 될 동안 지켜온 것은 근검절약이다. 남보다 부지런하고 절약하지 않으면 성공할 수 없다는 평범한 진리가 나를 지금의 위치로 올려놓았다. 사업이 언제나 순탄할 수만은 없다. 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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