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11월 삼원산업주식회사는 자가 물류창고를 확보하면서 석남동의 대로변으로 사무실을 옮겼다. 사업을 시작한지 16년만의 일이다. 밖에서 보기에도 물류창고 안에는 자재들이 지붕까지 높게 쌓여 있었다. 78년부터 학교를 졸업하고 처음 목재업계에 입사하면서 줄곧 목재산업에 희망을 버리지 않고 외길로 걸어온 25년 세월에 대한 보답이다. 다른 어떤 업계보다도 업체를 십년이상 이끌어가기 어려운 우리의 목재현실에서 삼원목재의 강정석대표가 걸어온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Image_View산이 좋아서 시작하게 된 나무와의 인연
처음 임학과와 인연을 맺게된 것은 우선 산이 좋아서였다고 한다. 그는 남들은 한두번 가기도 힘든 지리산을 스무차례 가까이 올랐다고 한다. 지금도 눈을 감으면 계곡과 바위들과 길이 머릿속에 그려질 정도라고 말한다. "처음 임학과를 선택한 건 산을 좋아했기 때문이었습니다. 후에 산림관계 공무원이 되더라도 늘 산에 가까이 하고 싶었던 거지요"라며 지금도 그때만큼은 안되지만 주말이면 끊임없이 산에 간다고 한다.
"예전에도 느끼던 일이지만 전국토의 70%가까이 산림을 가지고 있는 나라인데 산림정책과 자원의 활용도가 터무니없이 낮은 것을 보면 너무 안타깝습니다"라며 요즘의 산에 오르는 심정을 토로했다.


원목류 목재소재의 생활문화가 확산되길 
"최근에는 주변의 휴양림도 곧잘 다닙니다. 어떤곳은 너무 좋아서 몇 번이고 다시 가고 싶은 곳이 있습니다. 이런 일반인들이 나무와 자연을 느끼고 가까이 할 수 있게끔 하는 프로그램들은 더욱 더 많아져야 합니다."
목재야말로 우리 생활속에서 가까이 접할 수 있는 소재 중 자연의 산물로서는 유일한 자원이 아니냐고 말한다. 이렇게 자연을 느끼고 접촉하며 살아갈 수 있는데 점점 다른 대체소재에 의해 우리의 생활문화속에서 그 역할이 줄어드는 것이 안타깝다고 했다.
"그래도 86년, 88년의 국제적 행사를 치뤄내면서 우리나라 사람들의 주거문화에 대한 인식이 많이 발전했습니다. 그때 이후로 다양하고 고급스러운 문화가 보급되고 목재문화가 최근들어 가장 활발하게 생활속에 접근했던 때가 그맘때였습니다." 실제로 그때 이후로 아이엠에프를 겪었던 97년 이후까지는 원목류의 국내 시장도 호황을 누렸었다.


원자재 구매담당에서 지금의 자리까지
직장생활을 시작했던 처음부터 강대표는 원목류와의 인연을 가지고 일했다. 처음에 입사한 삼신산업(후에 한양합판과 한양목재로 흡수, 전환)에서부터 줄곧 원목과 자재의 구매부서업무를 담당했다. 원목과 시황을 분석하고 판단하는 일이 그의 본연의 업무였던 것이다.
그런 그의 안목은 아이엠에프에도 큰 타격없이 지나갈 수 있었던 근원이었던 것이다. "아이엠에프까지야 예상이나 했겠습니까? 하지만 그 이전에 계속 자재를 비축해둔 것이 결국 잘된 일이었습니다."
그는 겸손히 표현했으나 아이엠에프 때 타격없이 정상영업을 할 수 있었다는 것 자체가 정말 어려운 일이다.

 

"목재사업" 남자라면 한번 해 볼만한 일
그런 업무들을 하면서 강대표는 목재업체 사장들의 여유로움과 호탕함 그리고 몇 만톤급의 선박들로 물건을 사고파는 큰 스케일에 매료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생각했습니다. 아, 이런 건 남자로서 한번 해 볼만한 사업이다. 그래서 이후에 큰 결심을 하고 사업에 뛰어 들었습니다."
그 때부터 강대표는 고급 원목문화가 대한민국에도 곧 도래할 것이라는 판단을 하고 사업의 방향을 그 쪽으로 잡기 시작했다. 그의 판단은 아시안게임과 올림픽이 끝나면서 적중하기 시작했다.
89년부터 95년도 정도까지의 건설경기의 호황과 주택문화의 다양화가 회사를 크게 성장시켜 주었다.
"당시에는 건설현장의 인테리어도 고급화의 추세가 있었지만 가구산업 역시 원목가구가 고급가구이면서도 당시의 주력 가구산업이었습니다." 그렇게 건설과 가구 양쪽에서 북미산 특수목을 계속해서 주문했었다고 한다. 지금은 원목가구업체들이 많이 줄어들고 소규모 형태로 생산하고 있지만 당시에는 바로크가구, 한국가구, 을지가구, 밀라노가구 등이 원목가구 업체로서 이름을 떨치고 있을 때였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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