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을 졸업하던 1960년대. 외대를 졸업한 김사장의 친구들
사이에는 외무고시를 통해 외무부나 대기업 해외 사업부에 취
직하는 길이 비좁은 취업전장에서의 정도를 걷는 것이었다. 무역회사 입사를 희망하던 청년 김대웅도 궁극적인 목표는 그랬지만, 우선 임시라는 생각으로 목재회사에 입사하게됐다. 그래도 동명목재 등 일부 목재업체들이 대기업과 어깨를 나란히 하던 때였기에 서슴없이 발을 들여놓은 것이다. 이를 계기로 시작된 목재와의 인연이 지금껏 20여 년 이상 계속 되리라고는 전연 생각하지 못한 채 ….

 

Image_View중동 건설 붐이 가져 온 해외사업부의 매력
1970년대에 들어서자 세계의 이목이 중동으로 집중됐다. 이른바 건설 붐이 일기 시작한 것이었다. 10년 남짓 일했던 목재회사를 그만두고 김사장은 건설회사에서 3년이 채 못되는 기간동안 해외사업부에서 인력송출의 업무를 담당하게 됐다. 해외사업부를 통해 파견업무를 뛰게되면 봉급이 보통 인력의 3배를 웃돌았고, 보너스와 급료 인상부분도 상당했기에 샐러리맨들에게는 매력 넘치는 분야임에 틀림없었다.
그런데 시간이 흐를수록 생각은 다른 쪽으로 흘러만 갔다. 건설의 기초도 모르는 입장으로 보아도 중동의 건설 붐은 한시적일 테고, 언젠가는 해외사업 투자도 사라질 것이다. 그때가 되면 자신의 설자리는 어디에도 없을 테고 ….


국제상사 시절과 값비싼 인생 교육
70년대 후반기 무렵, 국내외적으로 종합무역이 발달하면서 우리나라에도 종합무역상사가 신설되기 시작했을 때다. 무역을 통한 꿈을 이루기 위해 당시 그룹계열 종합순위 4위를 오르내리던 국제상사에 입사하게 됐다. 공교롭게도 그곳에서 맡은 일이 목재담당이었고, 5년여의 국제상사 시절은 지금껏 무역을 통해 목재사업을 이끌어 온 그에게 더할 나위 없는 산 교육장이었다. 세상은 참으로 속고 속이는 전쟁터였다. 아니, 사업이란 것이 그랬다. 인터넷이란 것도 없을 당시에 목재를 전공도 하지 않은 그에게 목재담당 무역의 실무직은 그리 만만한 것이 아니었다.
3년간 아무문제 없어 방심하던 거래선이 부도를 내고 사라져 2억원에 달하는 손해를 입은 것이 처음이다. 타인 명의의 어음을 발행했던 사실을 알았을 때 비로소 속았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결과적으로 값진 대가를 치른 것으로 넘겨버렸지만, 참 힘겨운 경험이었다.
또 한번은 10억원 상당의 나왕원목을 수입했을 때의 일화다. 시중에 판매할 경우 20억원은 족히 될 물량이었는데, 한 업자로부터 모든 물량을 납품할 조건으로 단가 절하를 통해 15억에 거래를 시작했다. 불과 수개월이 지났을까 …. 어느 시점부터는 더 이상의 물건을 가져가려 하지 않는 것이었다. 나중에 안 사실이 김사장의 마음을 또 한번 뒤흔들었다. 나왕이란 것이 다 같은 것인 줄 알았는데, 색깔에 따라 시중에서의 가치가 전혀 달랐다. 흰색의 목재는 가공 후 페인트의 착색이 자유로운 반면, 노란색의 그것은 가장 힘들기에 별다른 가치를 못 갖는다는 것이었다. 거래선이던 업체는 백나왕만을 속속들이 빼내어 가고는 값어치 없는 것만을 남겨놓았다. 분량으로만 5억원이라 생각했는데 알고보니 2억원 가치밖에는 되지 않았다. 역시 세상은 힘든 곳이구나….


88올림픽과 민간외교
80년대의 국제상사는 중립국인 스웨덴에 지사를 두고 있었다. 물물교환의 방식으로 구소련에 청바지와 신발을 수출하고 대가로 원목을 수입하고 있었다.
88올림픽을 앞두고서 우리 정부로부터 한가지 부탁을 받았다. 올림픽에 구소련이 불참을 한다기에 아무리 교섭을 버려도 무소식이라는 것이다. 소련이 불참할 경우 관련 동구권 국가들의 불참이 예상돼 소련의 올림픽 참여는 중요한 과제였다. 국제상사에는 구소련과 무역거래를 하는 스웨덴 지사가 있으니, 그곳을 이용해 교섭을 벌여달라는 내용이었다.
그런데 생각보다 쉽게 해결됐고, 국제상사는 이일을 계기로 향후 5년간 구소련산 자작나무, 사시나무, 피나무 등을 독점할 수 있었다.
문제는 판로였는데, 지금이야 중국으로부터 값싼 제품을 수입하지만, 당시만 해도 자작나무로는 이쑤시게나 치과용 혈압, 아이스크림용 스푼을, 사시나무로는 나무젓가락을 국내에서 직접 생산하고 수출까지 했었기에, 관련업체에 납품을 하고 이윤을 남길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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