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년 가을, 최덕용씨는 노동부와 한국산업인력관리공단으로부터 가구회사를 상대로 경영에 대해 전문컨설팅을 하는 우리나라 최초의 공정관리분야 명장으로 선정됐다.
목수의 길로부터 시작된 가구인생은 그를 연매출 120억원 이상의 중소가구업체 최고경영자의 자리에까지 오르게 했었다.
전문경영컨설턴트로서 지난 40여년간 축적된 노하우를 가구산업의 안정과 후진양성에 힘쓰고자 하는 공정관리부문 최덕용명장을 만나보았다.

 

Image_View인생의 돛이 된 자립심 교육
만주 북간도가 고향인 최덕용명장은 1945년 8월15일 해방당시 고아가 돼 부산의 애린유아원에 입소하게 됐다.
“미국인 선교사가 운영하던 곳에 예닐곱살 때 전쟁고아로 입소했는데, 어린시절의 교육이 나를 참으로 강한 사람으로 만들었습니다. 스스로 자고난 자리를 게고, 청소와 설거지를 통해 자립심을 키우던 교육방식은 지금 영국이나 일본에서 유행하고 있는 노블레스 교육과도 일맥상통하는 것 같기도 합니다.”
손재주가 남다르게 좋았던 어린시절 보육원에서 목공을 배우기 위해 대패를 잡았지만, 책 보기를 좋아했던터라 그는 당시로서는 힘들었던 고등교육까지 받을 수 있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본격적으로 목수의 길을 걷게된 최씨는 64년 해병대에서 제대하고 난 후 종업원 50여명의 당시로서 제법 큰 규모의 가구공장 공장장의 자리에 올랐다.
직책이야 공장장이었지만 당시는 목공일을 함께 하면서 생산과 공정, 자재, 안전관리까지 도맡아야 했고 심지어는 판매영업까지 했었다.
“사회생활과 자주적인 사회인이 되기 위해서는 유년기 때 기술을 습득해야 사회에 진출하는, 싸워 이길 수 있는 가장 좋은 무기가 될 수 있다”는 당시 유아원 원장선생의 말씀을 기억에 새겨 놓았던 그는, 이 한마디가 직업선택의 결정적인 동기가 됐으며, 가구제작 목수가 된 지금을 있게 한 결정적인 요인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최고경영자가 된 목수
1969년, 그동안의 경험을 바탕으로 자신만의 가구회사 ‘대아가구’를 설립했다.
5∼6명의 기술자와 함께 시작했던 사업이었지만, 전문경영인으로서 그는 회사의 생산성을 극대화하기 위해 최선의 노력에 경주했다.
적은 인원과 공장규모로서 대기업에 대응할 수 없었던 그는, 가구의 형태와 색깔에 변화를 주는 다품종 소량 생산의 체계를 통해 사업기반을 닦은 후 1978년 공장을 포천으로 확장·이전했다.
이미 목수에서 공장장이 되면서 모든 공정관리를 세세하게 경험했던 그였기에, 가구 생산성을 늘리기 위한 방편은 다양했다.
지금은 일반화 됐지만, 1980년대초 일부 가구제작 공정을 기계화하고 성과급제를 도입했으며, 제품의 생산량 또는 금액 달성에 따른 조건부 토요일 휴무제도를 실시하기에 이르렀다.
“경영자로써 생산성을 높이기 위한 방안을 모색하던 중 당시로서는 모든 일들이 경영혁신에 해당하는 것이었습니다. 지금은 국가적인 시책이 되어 전산업에서 이를 수용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하고 있지만, 당시 작은 중소기업의 대표로서 참으로 큰 결단이었습니다.”
계속되는 경영자의 생활 중에도 책을 항상 벗을 삼던 그는 생산관리사 자격증을 비롯, 카운슬러 등 5가지 자격증을 취득하고 고려대학교 대학원 최고경영자과정도 이수했다.
그러던 중 1992년, 갑작스런 건강상의 이유로 공장의 경영권을 포기해야 했다.


공정관리를 통한 이웃돕기
건강을 회복한 최씨는 여건이 어려운 가구공장들의 경영지도와 공장 설비의 기계화를 유도하는 등 지원을 아끼지 않았고, 1996년 대아가구기술연구소의 설립과 더불어 본격적인 경영컨설턴트로서 활동을 시작했다.
“연구소 설립 후 지금껏 십여 곳의 크고 작은 가구회사의 경영지도를 했습니다. 기업의 최고경영자 중에는 전문경영인도 있지만, 평범한 기능인 출신도 적지 않습니다. 십수년간 그 분야의 베테랑을 자부하는 경영자의 사고를 바꾸는 일은 정말 쉬운 일이 아닙니다.”
한번은 공정관리를 위해 찾은 기업의 경영권과 노조가 분리된 터라 사장이 아닌 노조위원장에게 달려가 200여명 이상의 직원들에 대한 기술지도와 강연을 14개월간 했던 적이 있었다고 전한다.


명장이 사는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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