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age_View대나무처럼 곧고 강직하게
서울시 무형문화재 오죽장 보유자 윤병훈

나모도 아닌 거시 플도 아닌 거시,
곳기는 뉘 시기며 속은 어이 뷔연는다.
뎌러코 사시예 프르니 그를 됴햐 하노라.

-윤선도의 오우가 중에서

 

버려지는 대나무가 바꿔버린 운명
소위 잘 나가는 이십대 청년 무역인이 장인으로의 험난한 길을 걷도록 만든 대나무. 40여년 전 그가 한창 시계무역을 하던 시절, 우연히 지나던 길에 충남 부여 부근에서 대나무를 베어버리는 걸 보게 됐다. 아까운 생각이 들어 버려지는 대나무를 가져다가 이것저것 만들면서 당시에 주머니에서 돈이 마르지 않는다던 시계무역사업을 포기해버렸다.
그렇게 처음 대나무를 만난 인연으로 그동안 전수되지 않고 있던 죽장수업을 홀로 시작하게 된 것이다. “무역업을 계속했더라면 고생도 모르고 물질적으로도 풍요로웠겠지만 대나무를 만나 내자신을 찾았으니 그 걸로 족합니다”라며 미소를 짓는 윤병훈은 대나무와의 만남을 운명으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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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의 것을 탐하지 않는 신비함
그는 대나무를 찾아 전국일주를 5번이나 했다. 그러던 중 울진군 송씨네 대밭에서 기이한 광경을 목격하게 됐다. 송씨네 오죽밭 옆에 왕대밭이 있는데 마치 사람이 경계를 나눈 것처럼 서로의 영역을 침범하지 않고 자라고 있던 것이다.
대부분 오죽밭에 왕대를 심으면 오죽이 다 사라지는게 정석인데 전문가들도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만 했단다. 중국요순시절 순임금이 죽은 후 두딸이 피눈물을 흘렸는데 그 자리에서 소상반죽이라는 대나무가 돋아났다고 한다. 소상반죽은 푸른 대나무에 피가 떨어져 있는 모양을 하고 있다. 소상반죽에 얽힌 얘기처럼 대나무는 절 개의 상징으로 여겨져 왔다.
소상반죽의 전설을 들려준 그는 대나무의 절개와 송씨네 대밭에서 본 광경에서 대나무로부터 욕심이 없는 삶을 배웠다고 한다.


고심하던 접착기술 연구 성공 특허출원
Image_View대나무로 작품을 만드는데 가장 어려운 점은 대나무의 접착이었다.
이화여대박물관에 전해져 오는 대나무 공예품도 접착한 부분이 떨어져 복원을 했고 그가 기흥 경기도박물관 에 기증한 작품도 습기로 인해 접착부위가 약해져 곤혹을 치렀다고 한다.
96년이 돼서야 접착에 대한 가닥이 잡히기 시작해 현재 이 접착방법을 특허출원 해놓았다. 기존에는 아교와 부레 등 천연 접착제에 목분을 이겨 넣어 사용해왔는데 특허출원을 한 접착방식은 여기에 대나무로 만든 가는 못을 이용해 한번 더 고정을 해준다. 또 작은대나무를 큰 대나무가 둘러싸는 방식을 취하 고 뒷면에 베를 붙임으로써 견고함을 더했다.


보는 방향과 빛에 따라 달라지는 문양
오랜기간 대나무를 만지면서 선생이 독자적으로 개발한 기화화법은 열명이 보면 다 다른 문양으로 기억할 만큼 보는 각도나 빛에 따라 달라지는 오묘함을 지녔다.
기화화법으로 제작된 작품 중 통일을 염원하면서 10여년을 투자해 만든 것을 이북5도청에 기증했는데 기화 화법을 가장 잘 나타냈다고 스스로를 평가한다. 이 작품은 제작 당시 남북한 인구 5,500만을 형상화하기 위해 5555쪽으로 제작되기도 했다. 기화화법은 죽장서안에서도 볼 수 있는데 가운데 태극무늬가 보였다가 사라지는 것을 확연히 구분할 수 있다.

대나무 같이 곧고 굳은 삶
절개있는 대나무와 40여년을 지낸 그는 오랜 기간 의 작업으로 손가락이 모두 한쪽으로 휘었다. 휘고 굳은 손가락 뒤에 숨은 그의 내면은 그가 다뤄온 대나무와 이미 하나가 돼 있었다.
태국에서 전시회를 하던 중 한 중국인이 그의 작품을 보고 극찬하면서 ‘오죽신품’이라며 신이 만든 제품이 라고 추켜세우자 “나는 사람이지 신이 아니다”라며 그의 칭찬을 무색케하기도 했고, 그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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