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연 방수·방충·방부 도료 ‘옻’
Image_View서울시 무형문화재 생옻칠장 보유자 신중현

6·25전쟁때 피난을 가서 배우게 된 옻칠이 반세기 동안 업이 되어버린 사람.
옻칠의 재주를 인정받아 서울시무형문화재 1호로 지정되기도 하고 이승만 초대대통령이 미국 장군에게 선사한 탁자도 그의 손을 거쳐갔다.
팔다리가 온통 옻에 오른 자국이어도 남은 평생동안 일을 계속하겠다는 신중현 생옻칠장을 만났다.

 

생옻칠장으로 다시 태어난 하우스보이
Image_View6·25전쟁 당시 미군부대에서 허드렛일을 하는 하우스보이였던 어린 청년은 1·4후퇴때 부산으로 피난을 가게 됐다.
이 피난길이 지금의 생옻칠장이라는 칭호를 안겨주게 됐다는데…. 부산에 피난을 가서 누나와 함께 살게 됐는데 매형이 옻칠로 유명한 홍순태씨였다.
자연스레 어깨너머로 배우게 된 옻칠은 그 뒤 군대에 갔던 3년을 제외하고 평생을 함께 해온 일이 됐다. 그는 홍순태씨를 매형이 아니라 선생님으로 부른다. 그만큼 엄한 스승이었다.
처음 옻칠을 배울 당시 옻이 올라 고생도 많이 했다. 미국부대에서 나오는 폐자재로 대충 만든 판자집에서 더운 여름에 옻칠을 하다가 옻이 올랐을 때가 가장 힘들었다. 이승만 대통령이 벰 프리트 미8군사령관에 선사한 독수리탁자 바로 그 좁은 방에서 이뤄졌다.
휴전협정이 마무리되던 53년과 54년에는 대한공예원의 칠기제품 생산을 스승과 함께 담당했는데 이때 미국 시애틀 박람회에 출품을 하기도 했단다.
예전에는 지금과 달리 매를 맞아가며 기술을 배웠다. 맨 처음 배운 기술을 쉽게 포기하지 못하기도 하지만 어렵게 배운 것인 만큼 더 포기하지 못한 이유도 있었다.


옻칠 그릇, 문화상품으로 일본인에 인기
신중현 생옻칠장의 공방에는 한국사람보다 일본인이 더 많이 찾아온다.
일본에도 옻칠이 있으나 우리나라 옻칠이 훨씬 뛰어나다고 한다. 관광객들은 일본의 여러 잡지에 소개된 생옻칠공방을 찾아와 옻칠을 한 그릇을 보며 그렇게 좋아할 수가 없단다.
한 일본 잡지는 옻나무에서 수액을 추출하는 과정부터 옻칠이 마무리되기까지 동행해 일본에 소개하기도 했을 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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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안북도 태천칠이 제일
Image_View옻나무라고 해서 모두 옻칠을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옻은 개옻나무와 참옻나무가 있는데 옻칠을 할 수 있는 것은 참옻나무뿐이다.
예로부터 평안북도 태천칠을 제일로 친다. 남한에서는 원주가 칠이 좋다고 한다. 남원에서도 옻나무가 나지만 생칠을 할 수 없는 수준이라 화칠용으로 추출해낸다.
생칠은 나무에 이른 아침부터 칼집을 내 놓은 후 거기서 조금씩 흘러나오는 수액을 받아 채취한 후 사용하는 것이고 화칠은 칼집을 내기 부적합한 작은 옻나무나 생칠액을 추출한 후 남은 부분을 불에 태워 얻을 수 있다.
건칠은 옻수액을 말려 칠을 하는데 제작기간이 오려걸리는 만큼 보존력이 뛰어나다. 쟁반 하나를 건칠로 만드는데 4년이 걸린 적이 있을 정도.
보통 옻나무는 7∼8년 자라면 칠을 낼 수 있으며 아침부터 하루종일 추출을 하면 수분이 많은 요즘에는 300g정도를 얻을 수 있다.
옻의 자체 수분은 25∼27%가 가장 좋은데 옻칠은 수분, 습도, 온도가 잘 맞아야 한다.
옻의 독특한 점은 다른 것들은 물을 섞으면 묽어지는데 오히려 더 걸죽해지는 것이 특징이다.
옻칠은 석유나 송진액을 섞어 칠하는데 검정색이나 어두운 갈색만 있는 것이 아니라 색을 내는 가루를 섞어 다양한 색상으로 표현할 수 있다.


카슈칠이 옻칠로 둔갑하는 현실 아쉬워
Image_View화학칠이 늘면서 옻칠이 줄어들고 있다. 그나마 옻칠을 한다고 해서 보면 카슈칠을 옻칠로 속이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한번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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