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age_View도시 속 ‘소도’의 부활
솟대 대표 조각가 김남수

인사동 골목에 위치한 솟대.
입구부터 친근한 소재들이 우리를 반긴다. 솟대, 장승, 장독, 온통 나무로 꾸며진 아늑한 공간.
이곳은 조각가 김남수의 작업실이자 일반인들의 쉼터로 두가지 역할을 하고 있다.
그가 건네는 차 한잔에 온기를 느끼는 순간 벌써 그의 나무 이야기는 무르익고 있었다.

 

문패 만드는 아이
어린시절부터 범상치 않은 손재주를 보인 아이는 초등학교 시절부터 동네에 유명세를 떨쳤다.
변변한 도구도 없이 연필 깎는 칼 한자루로 도장과 문패를 만들어 어른들에게 선물을 하곤 했는데 그것이 목재와의 인연이었다.
중학교 시절에는 인천 사회복지회관에서 수출용품 제작을 위해 목공예를 가르쳤는데 여기서 조각을 배웠다.
70년대 중반에는 현재까지도 유일한 목공예 인력의 산실인 한양목공예학원의 강사로 재직하기도 했다. 80년대 초에는 공예가 활발했는데 당시 목공예학원 제자들의 일을 거들며 지방을 떠돌아다니다 문득 ‘장승은 왜 세울까’라는 의문을 가지면서 민속학에 관심을 갖게 됐다.


문화운동에 심취
Image_View결국 그는 장승, 솟대로 이어지는 민속적 목공예에 심취했고 그 원론을 찾기 위해 굿판을 채록하러 다니기에 이르렀다. 현재는 민족예술인총연합 산하 굿위원회 부위원장을 역임하고 있다.
한동안 그는 문화운동에도 동참했다. 80년대에는 각대학에 장승을 조각하고 세우는 일이 많았다. 장승을 제작해준 이후 시련도 많았다. 88년 연세대에 세운 장승이 절단되고 중앙대의 장승도 절단됐다. 그때 절단된 장승은 그의 카페 ‘솟대’입구를 지키고 있다.


소품은 공연의 역사
Image_View그는 공연예술 분야에서도 독보적인 위치에 있다. 2000년 ‘백범김구 못다한 사랑’이라는 뮤지컬의 소품인 탈을 제작했고 2000년, 2001년 연속으로‘우루왕’뮤지컬에 소품을 담당했다.
“소품은 한번 사용하고 폐기하는 것이 아니라 그 공연의 역사로 남겨야 합니다”라고 말하는 그는 탈을 제작하기 전 배우의 얼굴을 캐리커처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고 있다. 탈을 썼지만 그 배우를 보는 듯한 착각을 일으킬 만큼 출연배우의 성격과 닮은 탈을 만들기 때문이다.
은행나무로 만들어지는 탈은 황토흙과 아교를 섞어 칠하고 닦아내고 또 칠하기를 7회나 반복한다. 부드러운 샌딩보다 거친 칼자국을 좋아하는 그.
그의 탈은 거칠지만 사람냄새가 나는 이유는 바로 그것 때문이다.

 

문화상품 개발 절실
Image_View89년은 중앙극장 옆 인사동에 위치한 솟대가 탄생한 해이다. 주로 문화상품을 제작하는 공방이었는데 하나 둘 찾아오는 손님이 늘어 결국 카페 공방‘솟대’라 이름지었다. 솟대라는 이름은 상표등록을 마쳤는데 장애인 문학지에서 사용을 요청하자 흔쾌히 허락하기도 했다.
그는 문화상품에도 관심이 많다. 예전에 수학여행지에서 볼 수 있었던 탈 목걸이도 그의 작품이다. 지금까지 개발한 문화상품만 7여종에 이른다. 우리나라의 기념품은 어느 지역을 가도 똑같다. 그 지역만의 특산품이 없다는 것, 이점이 그가 가장 아쉬워하는 대목이다.
그는 민중미술협의회의 전시회에 출품한 ‘한국의 부작’이 문화상품으로 적합하다고 말한다. 풍경 등에서 볼 수 있는 물고기로 제작한 소품이 우리 정서와 잘 맞을 것이라는 설명도 덧붙인다.


탈을 쓰고 벌이는 한판 사물놀이
Image_View독학으로 소리도 배우고 풍물굿도 하며 목공예를 하는 그는 시쳇말로 만능 엔터테이너다.
3년전 그는 뉴욕에서 무용가 이선옥 박사와 사물놀이를 하는 이광수 선생과 함께 탈 제작 퍼포먼스를 선보이기도 했다. 오는 12월에도 샌프란시스코에서 한국문화를 알리는 행사를 기획 중인데 탈을 만들어 쓰고 사물놀이를 한판 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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