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age_View1997년,
21세기를 대비한 동북아 국제 물류중심 항만으로서의 부산 신항(新港)을 개발하기 위해, 부산 가덕도 해안, 진해시 용원동 및 안골동, 웅동만, 제덕만 일원을 개발하던 중, 제덕만(薺德灣)의 매립공사 과정에서 조선시대 삼포왜란 후 조정에서 설치했던 수중목책(水中木柵)의 일부가 지상에 노출됐다. 이에 동아대학교 박물관 에서는 유적의 발굴을 담당하였고, 필자가 속해 있는 기관에서는 출토 목재유물의 보존을 담당하게 됐다.
유적의 발견 초기에는 매립공사관계자 들이나 인근의 주민들이 수중의 목책에 대한 사전지식이 없었던 탓에 굴 양식을 위해 박아 둔 나무들이 올라온 것으로 보기도 했다. 그러나 양식을 위한 것으로 보기에는 목책이 지나치게 촘촘히 박혀 있고, 주민들 가운데 아무도 그런 시설에 대한 기억이나 인지가 없다는 것이 밝혀졌으며, 이 지역이 역사적으로 유래가 깊은 곳이라는 점에서 혹 임진왜란과 관계있지 않을까 하는 추론 하에 발굴조사를 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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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mage_View1997년 조사 당시의 목책은 해안선에 근접한 위치에서 발견됐지만 목책을 설치하던 당시에는 해안선이 100m 이상 바다 쪽으로 위치하였을 것으로 추정됐다. 목책의 설치에 대해서는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 중종 5년(1510)의 4월과 5월의 기사(記事)에도 기록이 있다. 소나무나 굴참나무로 만들어진 이 수중목책은 삼포왜란 후 농번기를 맞이해 축성할 여유를 갖지 못한 조정에서 우선 수중에 손쉬운 목책을 설치하여 왜구를 해안 입구에서 차단해보고자 하는 계책이었을 것으로 추정했다.
제포는 조선 초기 일본인들이 살며 장사하던 삼포(三浦;釜山浦·薺浦·鹽浦)의 하나로서, 경상남도 진해시 태천동(熊川洞)의 옛 지명으로 乃而浦 라고도 한다. 고려말기 이후 조선 초기까지 왜구의 노략질이 심해지자, 그 회유책으로 1443년(세종 25) 계해조약에 따라 삼포에 왜선(倭船)의 내왕 및 왜인의 체류를 허가했다. 그 뒤 상주를 원하는 일본인의 간청에 따라 약간 명에 한하여 허락했으나 거주자가 점차 늘면서 세종 말년에는 1500명으로 증가했다.
점차 교만해지기 시작한 그들은 조정의 명을 어기고, 관리들도 이들을 압박하는 일이 생겨 상호간에 자주 충돌했다.
Image_View이에 조정에서는 그들의 철거를 요구하고, 또 일본 선박에 대한 감시를 엄중히 하는 등 통제를 가하자 그들의 불평이 늘어 갔다. 그러던 중 1510년(중종 5) 일본인들이 경오란(庚午亂; 三浦倭亂)을 일으켜 제포를 점령하였다가 토벌대에 의해 수습되기도 했다.
그 뒤 한동안 왜인의 거주를 허가하지 않았으나 다시 수교할 것을 간청해 옴에 따라 다시 부산포와 함께 일본인들의 거주를 허락하게 됐던 곳이다. 제포는 군사적 요충지로서 임진왜란 당시에는 원균(元均)이 왜적과 싸운 곳이기도 했다.
삼포(三浦)란 지금의 부산진(釜山鎭)에 해당하는 동래의 부산포(釜山浦, 또는 富山浦), 지금의 경상남도 진해시(鎭海市)에 해당하는 웅천(熊川)의 제포(薺浦, 또는 乃而浦), 지금의 경상남도 방어진과 장생포 사이에 해당하는 울산(蔚山)의 염포(鹽浦)를 말한다.


 

Image_View본지는 우리 고유의 문화유산에서 목재의 흔적을 찾아 옛 선조들의 목재과학을 조명하고, 오늘날에 그 가치를 더욱 제고하여 과거의 목재문화의 계승 발전하여 찬란한 목재문화를 꽃 피워야 한다는 명제하에서 목재보존학을 전공한 문화제청의 김익주 선생님의 글을 연재한다.

프로필
문화재청 김익주
1959년생
1996 : 전남대학교 대학원 임학과 박사과정 수료
1986~현 : 문화재청 국립해양유물전시관 재직중(연구사)
한국문화재보존과학회 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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