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에 부지는 마련했지만 대구에 있는 공장시설을 옮기는 데는 여러가지 난처한 문제점들이 뒤따랐다.
시설을 옮겨서 가동하려면 적어도 5~6개월의 시일이 필요한데 그동안 대구의 공장을 쉬게 되면 자금운영면에서 지장이 있을 것으로 생각한 그는 부산공장에는 새 기계를 도입해서 설치하기로 방침을 결정했다.
새 시설은 4×8합판을 만드는 기계를 구입하기로 하고 일본의 나고야에 있는 태평제작소에 기계를 주문했다.
태평제작소와 도입계약을 한 기계는 로타리 레이스, 드라이어, 콜드프레스, 핫프레스, 센더 등 합판제조에 필요한 기계 일체였다.
당시 한일간의 국교가 없을 때라 수입절차상의 문제가 있었으나 기계는 무사히 도입되었고 수개월에 걸쳐 설치를 마쳤으니 그때가 1956년 12월 말이었다. 이때부터 성창기업은 부산에서 힘찬 새출발을 하였던 것이다.

최초로  미국에 합판수출을 하다
부산공장은 가동되었으나 대구의 공장이 문제였다. 대구의 공장을 부산으로 옮기기로 방침을 세웠다.
대구공장의 많은 기계와 인원들을 일시에 옮기게 되니 정태성 사장은 근 1년동안 부산에서 하숙생활을 하였다. 말이 하숙이지 거의 매일 공장에서 잠을 잤다.
종업원들이 퇴근하고 난 뒤 현장을 점검하고, 다음날 작업계획을 세우다 보면 어느덧 통금시간이 되고 공장에서 잠을 자기가 일쑤였다.
정태성 사장은 1957년 한 해를 ‘품질과 생산성 향상의 해’로 슬로건을 내걸고 기술자와 공원의 분간없는 단합과 노력을 당부했다.
그러한 노력의 결과로 합판의 품질도 점차 높아졌고 생산성도 나아졌다.
성창합판의 품질이 호평을 받게되고 일본산 합판과 품질이 비슷하게 되자 정태성 사장은 미주시장으로 눈을 돌렸다.
그리고는 수출업무에 대비해서 서울사무소를 개설하고 소장에는 둘째아들 해수를 임명했다. 첫째아들 해덕을 상무로 승진시키고 미국시장 상황과 기타 정보를 얻기위해 미국으로 보냈다.
1958년 4월, 미국으로 건너간 정해덕 상무는 여러가지 정보를 수집하고 미국 바이어들과 접촉을 시도했다.
그러나 성창기업 합판에 대한 사전지식이 전혀없는 미국 바이어들이 선뜻 상담에 응해주지 않았다.
정 상무는 바이어들을 끈기있게 설득하고 맨투맨 작전을 펼치며 우여곡절 끝에 미국의 US플라이우드社와 약 3만달러 상당의 시험수출계약을 성사시켰다.
수출액의 과다를 떠나서 우리나라 합판업계로서는 최초로 미국으로 합판을 수출할 수 있다는 그 뜻이 여간 큰 것이 아니었다.
1958년 8월, 마침내 성창합판이 부산항에서 선적되었고, 성창기업 전 종업원은 자기들 손으로 만든 합판이 미국으로 팔려간다는 자긍심에 떠나는 상선을 향해서 만세까지 불렀다.
미국상선이 서서히 부산항을 빠져나가자 정태성 사장은 회사간부 몇명을 데리고 영도섬 태종대에 올라가 오륙도를 옆으로 끼고 망망대해로 멀어져가는 상선을 바라보며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고 아무쪼록 이 배가 아무탈없이 미국에 도착하도록 기도를 하였다.
「하나님의 능하신 손 아래서 겸손하라. 때가 되면 너희를 높이시리라. 이는 저가 너희를 권고하심이니라」(베드로전서 5장 7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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