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봉선생이 태어난 1901년은 급격한 사회변동과 국난을 무수히 겪은 수난의 시기였다.

20세기 첫 해인 1900년에는 우리나라가 만국우편연맹에 가입하며 통신원이 설치되었고, 미국전기회사에 의해 서울 종로에 처음으로 전차가 가동됐다.

한강에는 철교가 준공돼 경인철도가 완전 개통되었다. 그 다음해인 1901년, 즉 설봉선생이 태어난 해는 그다지 큰 사건은 없었으나 그해 여름 가뭄이 극심해 정부에서는 방곡령을 내리고 혜민원을 설치해 안남미를 수입해다가 국민들에게 구호미를 방출하는 등 어려운 해였다.

이처럼 사회적으로 변화와 재난을 겪는 시기에 설봉선생이 태어났던 것이다. 본래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난 데다가 국가가 가뭄으로 재난을 당했으니 집안 살림이 얼마나 어려웠는지는 보지 않아도 짐작이 갈 만하다. 더구나 1904년 러일전쟁으로 인해 원산지방은 두나라 군마에 짓밟히는 전쟁터가 되었다.

출생과 소년시절에 대하여

이런 와중에도 소년 택보는 기독교 신자인 부모님을 따라 예배당엘 나갔으며, 10살이 되는 1910년에는 옥녀봉 밑 향교옆에 있는 문천보통학교에 입학했다.

어릴 때부터 총명했던 그는 서당에서 한문만 배우는 구식교육을 청산하고 예배당에 나가 성경을 배우고 한글로 된 여러가지 책을 읽기도 했다.

그당시 국민학교는 4년제였기에 14살 되는 1914년 이 학교를 졸업했다.

1910년 한일합방을 전후로 소년 택보네 마을 문천 교월리에도 여러가지 변화가 일어났다.

이 마을은 문천군 관내에서 제일 먼저 예수교가 들어온 동네였던 관계로 많은 개화군들이 들락날락하는 곳이었다.

예수를 믿는 과격한 청년들은 투전판을 습격하기도 하고 더 과격한 청년들은 마을 어귀의 성황당같은 미신의 잔재를 마구 때려 부수고 신주나 가묘를 철거하는 일을 하기도 했다.

이 일로 인해 예수믿는 사람에 대한 동네사람들의 박해가 시작됐다. 예수믿는 며느리가 시부모에게 쫓겨나기까지 하는 일도 일어났다.

소년 택보네 집은 원산집으로 불려지고 있었는데 가묘를 철거한 주모자는 예수를 믿는 원산집 소행이 틀림없는 일이라 하여
동네사람들은 소년 택보네 집에 호된 박해를 가했다.

소년 택보네 식구가 이 동네를 떠나게 된 원인이 여기에 있었다.

더 이상 그 압력을 견딜 수가 없었을 뿐 아니라, 고향에서 이토록 구박을 받으며 살 바에는 차라리 외지로 나가 예수믿는 사람들끼리 자유롭게 사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했다.

1914년은 제 1차 세계대전의 먹구름이 조선하늘에까지 뒤덮혔으며 전쟁으로 인한 민생고와 경제난은 날이 갈수록 심해지는 해였다.

더우기 소년 택보네 집은 본래부터 가난한데다 이러한 난세에 동네사람들로부터 박해까지 당하게 되니 그 고통이란 이루 헝용하기 어려운 지경이었다.

이럴때 먼저 북간도로 이주해 간 친척으로부터 ‘빨리 오라, 북간도는 자유천지다. 감자 농사가 어찌나 잘 되는지 감자 한 알이 요강만 하며 조 이삭이 어찌나 큰지 하나를 따서 허리에 두르면 마주 붙는다’고 소년 택보네 집의 이주를 권유하기도 했다.

드디어 소년 택보네 집은 신앙의 자유가 있는 북간도로 이주해 갈것을 결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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