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봉이 29세 되던 1929년 봄, 4년간의 고베고상 학업을 우수한 성적으로 마치고 영광의 졸업장을 받아 쥐었다.

그러나 그때는 국내에서는 광주학생 사건이 터져 한·일 두 민족사이에 감정이 더욱 험악해져 있었을 뿐 아니라, 경제계는 큰 불황에 봉착하여 정세가 흉흉하던 시기였다.

아무리 명문고를 나왔다 한들 취직이 쉬울리가 없었다. 더욱이 한국인으로서 취직을 한다는 것은 그때로선 하늘의 별따기만큼이나 어려운 일이었다.

그런데 설봉에게 누군가가 동양척식회사를 알선해줘 동경엘 갔다. 그러나 동경에 도착해서는 마음을 고쳐먹고 그냥  되돌아오고 말았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뜻밖에도 고베에 있는 여자 선교사로부터 반가운 기별이 왔다. 그 여선교사는 설봉이 고베고상 재학시절 영어성경을 가르치던 선교사였는데, 뉴욕 내셔널시티 뱅크 고베 지점에 자리가 하나 났으니 설봉을 소개해 주겠다는 것이었다. 너무도 반갑고 고마운 소식이었다.

설봉은 그날로 당장 뛰어가 그의 소개로 취직이 됐다.  대우도 다른 회사와 비교해서 꽤나 좋은 편이었다. 초봉이 다른 회사의 초봉보다 15원이 많은 80원이었다. 직원은 미국인 외에 일본인과 중국인이 30명 가량 되었는데, 한국인은 설봉 혼자 뿐이었다. 설봉은 남보다 더 열심히 일했고 뛰어난 수완을 발휘하여 모두에게 칭찬을 받았다.

자, 이제는 취직도 되고 자리도 웬만큼 잡혔으니 아내를 일본으로 데려와야 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 그만큼 아내가 그리워졌던 것이다.

늘 떨어져 살아야만 했던 불쌍한 아내에 대한 생각이 새삼스러워지며 애정이 북받쳐 올랐다. 그렇지만 그것도 그리 간단한 문제가 아니었다. 

고베는 항구도시이기 때문에 부둣가에 막일꾼이 많았다. 그중에는 조선인 노동자가 큰 비율을 차지하고 있었다. 그러다 보니 조선사람들의 대부분이 경제적으로 하층 계급에 속해 있었음으로 ‘조센징’이란 경망스러운 소리를 자주 들었는데, 아내를 이곳으로 데려와 멸시를 당하게 하는 것은 상상조차 하기 싫은 일이었다. 그러면 어떻게 하나? 그렇다고 언제까지나 이렇게 아내와 떨어져 살수는 없지 않은가?

이러한 생각들로 그의 고민은 날이 갈 수록 더욱 커져만 갔다.
드디어 설봉은 아주 어려운 결단을 내리고 만다. 좋은 직장을 그만두고 아내가 있는 용정으로 돌아가기로 결정한 것이다. 몇달만 참으면 만주 하얼빈이나 봉천에 있는 뉴욕내셔날 시티뱅크 지점장으로 보내 주겠다는 은행당국의 만류도 뿌리쳐 버렸다.

이 일은 미국은행에 취직한지 불과 몇달이 되지 않은 1929년 말에 있었던 일이었다. 그리하여 설봉은 아내와 떨어져 산지 실로 9년만에 다시 같이 살게 됐다.

결혼하자 마자 서로 헤어졌던 만큼, 그야말로 신혼살림이나 다름없는 행복한 생활이 시작되었다. 설봉은 불충분했던 지난 날을 사죄나 하려는 듯 온갖 애정으로 아내의 오랜 고독을 달래주려고 노력했다.

글 ; 김상혁 / shkim@woodconsulti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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