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종영 충남대학교 연구교수
박종영 충남대학교 연구교수

편집자주 = 본 특별기고는 국립산림과학원의 '산림과학연구 100년사'에 실린 원고입니다.

 

1. 목재이용연구의 기원

1922년 임업시험장의 창설과 함께 이용계가 설치되면서 제탄시험을 한 것이 목재 이용연구의 시작이다. 탄화연구는 1945년 까지 이어졌으며, 1940년대에 들어서는 송근유(松根油)의 채취, 건류에 대한 시험이 집중적으로 수행되었다. 또한 1932년에는 임목 수피로부터 공업용 원료인 탄닌을 추출하는 연구를 하였고, 리기다소나무, 소나무에서 수지를 채취하는 시험이 1940년까지 계속되었다. 한편 목재재질에 관한 연구로서는 1931년에 압록강변 목재에 대한 강도시험을 최초로 실시하였고, 유명한 연구자인 야마바야시(山林)에 의한 ‘조선산 목재의 식별’이라는 방대한 연구결과가 1938년에 보고되었다.

이와 같은 흐름에서 알 수 있듯이, 조선총독부 임업시험장에서 수행된 목재이용연구는 주로 산림자원으로부터 이른바 바이오에너지 생산을 목적으로 하였으며, 이는 1937년에 일본이 일으킨 중일전쟁, 그리고 1941년 말 일본의 진주만 기습으로 시작된 태평양전쟁과 밀접한 관계가 있었다. 대표적인 사례가 1930년대에 수행된 칠액 채취 시험은 중일전쟁 당시에 포탄, 군용케이블, 탄약상자 등의 부식과 부후를 방지하기 위한 것이었으며, 송근유는 태평양전쟁의 절정기에 부족한 항공기 연료 등을 공급하기 위한 목적이었다. 이처럼 한반도의 산림자원으로부터 군수물자를 공급하기 위하여 목재이용연구가 수행된 것은 불행한 역사이다. 그러나 자랑스러운 역사뿐만 아니라 불행했던 과거일지라도 지울 수 없는 역사의 한 부분으로 기억해야 할 것이다.

 

2. 임산공학연구의 본격화, 시설장비의 현대화, 목재산업의 뒷받침

국립산림과학원 故 조재명 원장
국립산림과학원 故 조재명 원장

임업시험장에서 목재이용에 관한 연구가 본격화되기 시작한 것은 1960년대 중반부터이며, 1970년대에 들어서 연구영역이 세분화되고 연구과제도 다양해졌다. 1967년에 산림청이 신설되고 1973년부터 『치산 녹화 10개년계획』이 착수되어 1998년에 시작된 『제4차 산림기본계획』에 이르기까지 산림정책의 방향은 사방사업에서 치산녹화, 산지자원화, 지속가능한 산림경영으로 순차 전환되었다.

이와 같은 약 30년간의 변화와 성장의 과정에 목재이용 및 목재산업에 관한 정책과 연구도 활발히 전개되었는데, 그 중심에는 제10대 원장(1989~1995)을 역임한 조재명(趙在明)이란 인물이 있었다. 그가 주도적으로 이끈 연구분야는 목재규격, 목재재질, 제재, 목재건조, 목구조, 목재보존, 목재접착, 합판·보드, 목재화학, 목재탄화 등의 목재공학분야에서 펄프·종이, 임산에너지, 임산버섯에 이르기까지 모든 분야를 망라하였다. 또한 임업시험장은 1972년 7월에 창립한 한국목재공업기술협회(1978년에 한국목재공학회로 개칭)를 비롯하여, 관련 학회 및 연구회의 산실이 되었고, 조재명 원장이 그 산파역을 맡았다.

1960년대 말~1970년대 초에 목재이용 연구에 획기적인 시설 장비 현대화가 이루어졌다. PAC 자금이라고 불린 대일청구권 자금에서 시험연구용 기자재를 확보하여 1969년에 각종 현대식 시험연구장비가 도입되었다. 이 때 도입된 시험장비는 로타리레이스 단판절삭기, 열압기 등 합판제조 및 2차가공 파이롯트 설비, Hilde brand 형 목재건조장치, 목재가압방부장치, 100톤 용량의 실대강도시험기, 만능강도시험기, CHN 원소분석기, 가스분광분석기(GC), 핵자기공명분석기(NMR) 등의 기기분석 장치, 그리고 수병과에 설치한 전자현미경 (SEM) 등이다. 이와는 별도로 1973년에 20L 용량의 다이제스터, 폭 30㎝의 장망식 파이롯트 초지기, 파이롯트 종이코터 등 80점의 펄프·종이제조 및 물성시험기기가 도입되었다. 또한 온도·습도를 조절할 수 있는 6개의 항온항습실과 강도시험실, 기기분석실, 펄프·종이시험실 등을 갖추었다. 이를 계기로 임업시험장은 1970년대 초에 동양에서 일본 다음으로 첨단 시설장비를 갖춘 연구기관이 되었다. 이러한 최신 연구시설의 구축은 조재명 원장이 앞장서서 이루어낸 결과였다.

조원장님 장녀의 대한민국과학상 수장을 축하하는 기념사진.
조원장님 장녀의 대한민국과학상 수장을 축하하는 기념사진.

한편, 임업시험장은 1960년대부터 목재 산업의 발전을 선도하거나 지원하는 역할을 수행하였다. 조재명 원장은 합판산업이 수출특화산업으로 선정되기 전인 1960년대 초에 청와대 수석회의에 가서 합판수출의 중요성을 강력히 주장했다고 회고한 적이 있었다. 이후 세계 최대의 수출국으로 성장한 합판산업이 수출중심의 산업화 시대를 견인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때부터 임업시험장은 합판산업에 대한 기술지원 또는 검사기관의 역할을 담당하였다. 또한 조재명 원장이 강한 의지로 경제기획원과 상공부를 설득하여 1970년대에 국내 최초의 크라프트 화학펄프공장 건설이 실현되었으며, 펄프 원료의 국산화를 위한 연구를 수행하고 그 결과를 적용한 것은 전무후무한 사례이다.

 

3. 조재명 원장과 국립산림과학원의 발전

올해 설립 100주년이 된 국립산림과학원.
올해 설립 100주년이 된 국립산림과학원.

조재명 원장이 국립산림과학원의 후대에 남긴 가장 큰 업적은 조직과 정원을 확대, 발전시켜서 산림·임업·목재연구 백년대계의 토대를 구축한 것이다. 조재명 원장이 첫발을 디딘 1962년 당시의 임업시험장은 농촌진흥청 산하에 4과(육종, 조림, 이용, 보호)·1지장(하동), 정원 39명의 미미한 연구기관이었다. 이후 4차례의 대통령령에 의한 직제 개정을 통하여, 정원이 39명(1962년)➟82명(1966년)➟140명(1978년)➟327명(1987년)➟342명(1991년)으로 증원되었고, 1991년에는 2課(서무·기획), 4부(산림환경·임산공학·산림생물·산림경영), 12科, 2시험장, 1시험림관리소의 조직체계를 갖추었다. 이와 같은 조직 확대를 위한 직제 개정에 조재명 원장이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다.

또한, 조 원장은 연구시설 확대를 적극 추진하여, 본원 종합연구동과 중부임업시험 장(산림기술경영연구소) 본관을 신축하고, 남부임업시험장(산림바이오소재연구소) 자료관을 개관하고, 산림과학관 건립을 착수하였으며, 임산공학연구동 신축계획을 수립하였다. 아울러 미래의 산림·임업연구 기반을 조성하기 위한 각 지역의 시험림 확대에도 주력하였다.

조재명 원장이 심혈을 기울인 또 하나의 업적은 광릉수목원(1999년에 국립 수목원으로 분리, 독립)의 조성이었다.

1985~1987년에 수목원 내에 건립된 세계 최대 규모(4,617㎡)의 산림박물관은 조 원장이 건축에서 전시까지 직접 구상한 작품이다. 한국산 목재를 사용하여 우리나라 최초로 전통과 조화를 이룬 현대식 구법의 목조건축물을 건립하였다. 필자는 광릉의 산림박물관과 홍릉의 산림과학관을 설계한 전 명지대학교 김홍식 교수로부터 “조재명 원장님은 내가 가장 존경하는 분이다”라는 말을 열 번쯤 들었다.

 

4. 열정의 巨木 조재명

국립산림과학원 故 조재명 원장
조재명 원장 추모위원회가 발간한 헌정 책자(미 디어우드 발행).

필자가 조재명 원장님을 상사로 모셨던 기간은 일본 유학 4년을 포함하여 약 15년 이다. 사실 일본 유학은 조 원장님이 이용 부장이셨던 1985년 말경 “아무래도 유학을 갔다 오는 것이 좋겠어”라는 권유로 시작되었다. 정신없이 일에 몰두하던 시기였다. “예, 그러면 일은 어떻게 하지요?” 했더니, “일은 내가 알아서 할 테니, 갔다 와.” 얼마 후 다시 부장실로 부르시더니, “구주대학(九州大學)이야. 구주대학도 괜찮아.” 하면서 일본에서 보내온 두툼한 봉투를 건네주기에 비로소 구주대학의 지인 교수와 의논하셨다는 것을 알았다.

조재명 원장님과 함께 일해 본 사람이라면 일에 대한 열정을 먼저 떠올리게 된다. 불꽃처럼 온몸을 사르던 업무일과는 하루도 평온하지 않았다. 끊임없이 새로운 일을 만들고 일구어냈으며, 항상 저만치 앞서 나갔다. 조 원장님 별세 후, 고인과 함께했거나 따르던 분들의 뜻과 후원을 모아 추모사업을 추진하였다. 추모사업은 공적비 건립, 조재명賞 제정, 추모집 발간 등 비-상-책(碑-賞-冊) 세 가지였다. 그 비용은 후원금과 유족들의 답례 출연금으로 충당되었다. 대한민국의 공직자로서 이 ‘비-상-책’을 모두 갖추어 추모된 인물은 극히 드물 것이다.

아래는 추모집 <열정의 巨木 조재명>에 실린 글의 일부이다.

“당신은 평생을 한 직장에서 보내면서 창의와 예지 그리고 의욕으로 이 나라 목재공학과 목재산업 발전에 크게 기여한 성공한 지도자였습니다. 많은 사람들의 가슴 속에 묻혀서 길이길이 빛나리라. 사랑하는 동지여. 편히 쉬소서!” - 심종섭(전 대한민국학술원 회장)

“그분의 성품과 인격, 생활철학을 롤모델로 삼아 닮아가려고 노력하였다. 가장 큰 덕목인 성실성, 정확한 목표를 세우고 끝까지 이루려는 집념과 열정, 매사에 긍정적인 사고와 예리한 판단력, 도움이 필요한 사람에게 최선을 다하여 도와주는 따뜻한 마음, 옳지 않은 일은 가차 없이 나무라는 단호함을 배웠다.” - 황재우(영남대 명예교수)

“조 선생님과의 만남이 1982년부터이므로 ‘이제 곧 30년이 되는구나’라는 감회에 빠져있던 여름에 선생님의 부음을 접하고, 저는 정말 하나밖에 없는 귀중한 분을 잃어 버렸다는 외로움과 깊은 슬픔에 빠졌습니다.” - 스기우라 긴지(杉浦銀治)(국제목탄협력회장)

조재명 원장은 우리나라 산림⋅임업⋅목재 연구의 요람인 국립 연구기관의 정원을 열배로 확장, 발전시킨 주역이었다. 많은 인재를 키워냈으며 목재산업 기술보급의 중심 역할을 하였다. 한국목재공학회, 한국펄프종이공학회, 한국목재보존기술진흥회, 한국임산에너지학회, 한국임산버섯연구회, 한국숯연구회 등을 창립하여 학문과 산업 발전의 토대를 만들었다. 퇴임 후에는 소호 문화재단을 설립하여 산림을 종합적인 문화⋅휴양공간으로 조성하는 시범적인 사업을 구상하고 추진하였다. 탁월한 능력, 도덕성, 카리스마를 지닌 열정의 리더였다. 빈말은 하지 않았다. 직선적이었다. 겉으로 드러내지 않으면서 세심하게 챙겨주는 인정 많은 사람이었다. 2008년 8월 19일, 75세를 일기로 활화산 같았던 삶을 마치었다. 지금까지 그렇게 일한 사람은 없었다. 앞으로도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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