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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화유치원, 다시 볼 수 없는 아빠와 나의 유치원 2002년 제기동, 투명한 5월의 봄날입니다. 큰 길에서 볼 때는 무엇이 있을지 알 수 없는 버드나무 숲을 따라 안으로 들어가 봅니다. 100미터쯤 지났을까, 어지럽고 시끄러운 바깥 세상과는 전혀 다르게 조용하고 여유로운 단독주택들이 가지런히 나타납니다. 더 위로 올라가니 설렁탕의 유래가 되었다는 선농단이 울창한 향나무들에 둘러싸여 조용히 자리하고 있습니다. 무언가 잘리고 작아진 것이 왠지 아까 지나온 입구의 숲길과 하나였을 것 같은 느낌이 듭니다. 길을 더 가봅니다. 여전히 조용한 주택가, 초등학교가 나오고, 아까보다는 작은 집들이 나타나는가 싶더니 눈앞에는 별안간 황무지가 펼쳐집니다. 동네를 한꺼번에 들어내듯, 수십 채의 집들이 철거되고 콘크리트와 벽돌, 잡초와 흙이 뒤섞인 거칠은 땅 저쪽으로 붉은 색 벽돌에 회색 지붕을 얹은, 조금 커다랗고 오래된 두 동의 건물이 눈길을 끕니다. 다가가 노란색 철문에쓴 글씨를 읽어봅니다. ‘소화유치원.’ 유치원은 원래 성당이었습니다. 서울교구에서 명동(1881년), 중림동 약현(1891년), 혜화동(1927년)성당, 그리고 도림동(1936년), 용산(1941년)에 이어 6번 째로 자리잡은 본당으로 1942년에 프랑스의 쟝 꼴랭 신부가 부임해 갖은 고초를 겪으며 지금의 터를 일궜다고 합니다. 안내해 주신 수녀님의 말씀으로는 본국에 있던 어머니를 모시고 와 신부님의 사제관에서 같이 생활하셨다 합니다. 1957년 근처 언덕에 지금의 제 기동 성당이 지어지면서 옮겨가고, 이후에, 바오로 병원이나 중국인 성당으로 쓰이다가, 1963년 몬테소리 교육을 가르치는 유치원이 되었습니다. 처음에는 매우 인기가 높았고, 지금도 지역주민들이 많이 찾는 유치원이라 합니다. 문제는 이제 곧 재개발로 유치원은 이곳을 떠나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여기 한 장의 사진이 있습니다. 1947년 6월1일. 성당으로 쓰였던 당시, 마당에 모두 나와 견진성사를 기념하는 장면입니다. 가운데에 흰 수염이 덥수룩한 분이 쟝 꼴랭 신부님인 듯합니다. 지금은 없는 종탑과 어머니와 같이 살았다던 초가집도 눈에 띕니다. 하지만 커다란 마당에 붉은색 벽돌벽, 개량기와 지붕, 안에 있는 오래된 창과 문 그리고 손잡이까지 모두, 유치원은 처음 지어진 당시 그대로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었습니다. 그 후로 7년이 지났습니다. 유치원과 그 주변에는 커다란 아파트 단지 하나가 똬리를 틀고 있습니다. 답사 중 수녀님은 “저희 성당 유치원은 부모들이 아이들 손을 잡고 와서 이렇게 말해요. 와 신기해! 내가 다닐 때랑 하나도 바뀌지 않았어 라고요”라며, “여기를 떠나 다른 곳으로 가는 것이 너무 아쉽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좋아지자고 개발을 하는 것이니 어쩔 수 없다고도 했습니다. 사무실 벽에는 새로 지어 이사 할 생경한 모양의 유치원 투시도가 걸려 있었다. 지금도 교실을 둘러 볼 때의 생각이 납니다. 조금 낡은 듯한 공간이지만, 아이들이 재잘거리며 방 안을 빙빙 돌고 있었습니다. 아마도 그 자리 아이의 부모들도 이 방에서 저 마당으로 놀았겠지 하며 흐뭇했던 기억, 그리곤 이내 속 깊은 아쉬움에 잠깁니다. 부모도 아이도 같 이 추억할 유치원조차 지키지 못하는 우리 현실에 대해서 말입니다. 아버지가 딸을 데리고 자기가 다닌 유치원으로 데려옵니다. 유치원의 모습은 자기가 다녔을 때와 다르지 않습니다. ‘우리가 도시에서 만들어 간다고 하는 것, 좋은 도시가 가져야 할 것이 있다면 무엇일까?’하는 제 생 각에는, ‘기억’, 시간이 지나도 많은 사람들이 그것에 의지해 무엇인가를 떠올릴 수 있는 '공유된 기억'이 중요하다는 생각입니다. 이것은 복원에 치중해 박제화된 역사보다 중요한것이라 생각합니다. 글/사진_구가도시건축연구소조정구대표 ‘서울 진풍경’의 연재를 마칩니다. 2009년 4월 16일 제 22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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