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69년, 포도밭에 작은 제재소로 출발
영림목재는 1969년 현 이경호 회장의 부친(이영복 씨, 작고)이 인천 간석사거리 포도밭에 세운 영림목재(법인이 아닌 개인회사)라는 작은 제재소로부터 시작됐다. 당시 간석사거리는 포도밭이었는데 현 이경호 회장의 부친은 이 포도밭의 일부를 임대해 그 자리에 포도나무를 뽑아내고 발동기와 수동제재기를 놓고 절단목을 제재했다.

설립 당시 대표자는 이영복 씨의 부인인 강영신 씨의 이름으로 사업자등록을 했다. 이영복 씨가 본인 이름으로 사업자등록을 하지 않고 부인의 이름으로 사업자 등록을 내게 된 이유는 정확하지는 않지만 초창기 영림목재에 근무했던 임호식 씨(1948년생, 현 장연물류 대표)의 말에 의하면 이영복 씨는 영림목재를 하기 전 주물공장을 했는데, 주물공장의 영업이 잘못돼 회사는 도산하고 집도 차압당하는 상태였다.
이후 재기하는 과정에서 설립한 제재소였기에 자기 이름으로 등록하지 못한 것이 아닌가 추정된다고 했다. 초창기 영림목재는 인천의 대형 합판 회사인 대성목재와 선창산업으로부터 절단목과 박심을 사다가 직원 10여 명이 목상자를 만들었다. 목상자는 삼학소주, 진로소주, OB맥주, 크라운 맥주 등의 포장상자용으로 납품했다.

● 1972년, 삼학소주의 부도로 첫 시련
영림목재는 목상자를 생산해 소주회사, 맥주회사에 납품을 하면서 점차 자리를 잡아나갔다. 1972년 당시에는 목상자의 80% 정도를 삼학소주에 납품했다. 하지만 1972년 삼학소주가 부도가 났다. 영림목재는 삼학소주로부터 받은 어음을 거의 대성목재에 절단목 구입 대금으로 입금을 시켰는데 삼학소주의 부도는 회사에 큰 영향을 미쳤다. 그러던 중 삼학소주가 곧 회생될 것이라는 소문이 돌자 브로커들이 어음금액의 절반에 현금으로 인수하겠다는 제의가 들어왔다. 영림목재 이영복 씨는 고민 끝에 ‘현금만이 살 길이다’라는 결론을 내리고 어음 금액의 절반을 받아 대성목재에 입금시켰다. 실로 어려운 결정이었다. 50%의 재정적 손실을 감수하고 신용을 지키기 위한 처절한 노력이었다. 신용을 지킨 것에 대한 보답이라고 할까. 전화위복으로 영림목재는 ‘샘표식품’에 완성품 목상자(간장상자)를 납품하게 됐다. 샘표식품은 한달에 세 번, 즉 열 흘마다 납품금액을 마감해 현금으로 지급했다. 샘표식품에 납품을 계속해 나가며 영림목재의 재정은 나아지기 시작했다.

● 1974년, 도화동에 제재공장 신축
샘표식품에 간장상자를 납품하며 열흘마다 현금으로 결재를 받은 영림목재는 날로 발전해 1974년 4월에는 도화동(인천시에서 염전을 매립해서 분양한 땅)에 새로운 공장을 짓고 이사를 갔다. 도화동에서도 일감이 많아 야간작업까지 하며 3교대로 작업을 했다.

● 1978년, 이경호 회장 영림목재 입사
1978년 이경호 회장의 부친 이영복 씨가 갑작스러운 병환으로 입원하자 위기감을 느낀 아들 이경호 씨(당시 그의 나이 29세, 인천고 67회 졸, 중앙대 경영학과 출신)는 대학 졸업 후 다니고 있던 대우전자(무역부에서 유럽 수출담당)를 퇴사한 뒤 영림목재에 차장으로 입사했다. 아버지의 갑작스러운 병환이 현 이경호 회장의 앞길을 바꿔놓게 된다.

● 1979년, 삼성전자에 파렛트 납품 시작
이경호 씨는 부친이 주력했던 품목인 목상자가 점차 플라스틱으로 바뀌게 되는 추세를 감지하고 새로운 품목을 구상하기 시작했다. 당시 소주상자, 맥주상자, 간장상자 등은 플라스틱 상자로 바뀌기 시작했지만 냉장고, TV 등 가전제품 회사에서는 파렛트를 많이 필요로 하고 있었다.

이경호 차장은 파렛트를 만들어 냉장고 회사에 납품하기로 결정을 내리고 파렛트를 만들기 시작한 지 6개월 만에 삼성전자에 냉장고용 파렛트를 납품하게 됐다. 당시 삼성전자에는 4개 회사가 파렛트를 납품하고 있었는데 그 중 3개 회사는 수원 삼성공장내에 입주해서 파렛트를 만들고 있었다. 그러나 신규 납품업체로 참여하게 된 영림목재는 인천 도호동 공장에서 파렛트 제품을 만들어 납품을 해야만 했다. 삼성공장 내에서 파렛트를 만들어 납품하는 회사보다 여러모로 불리한 조건이었다.

하지만 영림목재는 이러한 불리한 여건 속에서도 주문받은 제품을 삼성공장 아침 작업시간 전까지 공장에 가져다 놓았다. 야간운송을 했던 것이다.

이경호 회장은 그 당시를 다음과 같이 회상한다. ‘당시 통행금지가 있었을 때지만 화물트럭은 예외였어요. 저와 직원 2명이 밤새 트럭 3대로 옮겼죠. 다음날이면 작업대에 놓여있는 파렛트를 보고 삼성전자 직원들이 놀랄 정도였어요.’

참고자료 : <영림목재, 마흔 나이테>
<다음호에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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