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종합목재Ⅰ

현대종합목재의 모태는 현대건설
1980~90년대 우리나라 목재산업의 주름잡고 있던 현대종합목재의 모태는 현대건설이다. 현대건설 정주영 회장(1915년생)은 건설사업을 하면서 자신이 지은 아파트에 인테리어를 하기 위해 설립했던 동남목공소(東南木工所)를 1977년 6월 현대건설 가구사업부로 개편했다. 사업본부장에는 현대건설 기획실장 정장현 씨를 이사로 승진시켜 임명했다.
가구사업부가 발족되자 해외시장(특히 중동지역)에서 주문이 쏟아졌다. 발족 후 한달 만인 그 해 7월 사우디아라비아로부터 100만 달러 상당의 목재문, 후로링보드, 문틀재를 주문 받았다. 당시 현대건설의 중동지역 건설사업을 바탕으로 엄청난 주문이 쏟아졌다.

1978년, 금강목재 설립
중동으로부터 창문의 목재틀, 목재문, 문틀재, 후로링보드, 가구 등의 주문이 많아지자 현대건설 정주영 회장(당시 64세)은 가구사업부 발족 6개월 만인 1978년 1월 1일 현대건설 가구사업부를 ‘금강목재’라는 자회사로 독립시켰다(1977년 10월 현대건설 가구사업부 과장으로 특재 입사한 원종영 씨의 증언).
당시 원종영 씨(서울대 농대 임학과 졸업, 대성목재 근무)는 동양목재산업(만석동에 있던 OLC)에 근무하다가 1977년 10월 현대건설 가구사업부 과장으로 특채 입사했고 후일 현대종합목재의 용인공장장, 상무 등을 역임했다.

1979년, 후로링보드 KS표시 획득
금강목재는 1979년 공업진흥청으로부터 가압식 방부처리 후로링보드, 창문의 목재틀, 목재문, 문틀에 대한 KS표시를 획득했다. 1979년 8월에는 세계 1류 호텔인 미국 시카고 하얏트 호텔에 나이트 스탠드, 옷장, 호텔용 가구 등 850만 달러의 수출을 했고, 중동 바레인의 디폴로매트 호텔에 가구류 4,600점(146만5천 달러 상당)을 수출하는가 하면 카타르의 도하호텔(쉐라톤 호텔의 체인호텔)에 객실 및 회의장용 가구 1만3천점(664만 달러 상당)의 수출도 했다.

1981년, 상호를 ‘현대종합목재’로 변경
현대건설 정주영 회장(당시 그의 나의 67세)은 1981년 1월 1일부로 금강목재의 상호를 ‘현대종합목재’로 개명하고 대표이사에 박재면 씨를 임명했다. 현대종합목재는 그 해(1981년) 경기도 용인에 대규모 목재 공장을 신축하고 후로링보드, 제재목, 문틀, 혼례용 가구 등을 대량으로 생산하기 시작했다.
그 해 1월 20일에는 인도네시아 목재사업체인 ‘사랑삽타브트라’社와 51:49의 비율로 목재공장합작투자 계약을 체결하고 연간 10만㎥의 남양재 제재목 수입을 확보했다. 당시 현대종합목재는 미국 가구시장(연간 2억 달러에 달하는 규모)의 50~60%를 점유하고 있었는데, 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로부터 원목 및 제재목을 수입해서 국내에서 반제품을 만들고 미국의 현지공장에서 조립만 해서 판매하는 것이라서 채산성도 무척 좋았다. 당시 삼성(三星)물산도 이에 질세라 삼미사가 자금난으로 내놓은 가구사업부를 인수해 미국의 가구시장에 진출하기도 했다.

1984년, 10억 적자 정주영 회장 불호령
그렇게 수출이 잘 되던 ‘현대종합목재’는 1984년 상반기에 10억 적자를 기록했다. 현대그룹내에서는 유일하게 현대종합목재만이 적자를 낸 것이다. 그러자 정주영 회장의 불호령이 떨어졌다. 정주영 회장은 가구부문 적자에 진노해 적자요인을 해소하라는 엄명을 내렸다. 현대종합상사는 사장이하 전 직원에 초비상이 걸렸다. 경영진들은 적자요인을 분석한 결과 내수에 전력을 기울이지 않았던 것을 주요 원인으로 지적했다. 원래 현대종합목재는 수출을 제 1의 목표로 삼고 출범했지만 1984년 가구수출이 부진했을때는 내수에 신경을 썼어야 했는데 내수에 신경을 쓰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중소기업형인 기존가구업체와 경쟁을 하자니 그룹회사로서의 체면도 살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때부터 현대종합목재는 ‘리바트’라는 브랜드로 국내가구시장을 본격적으로 공략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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