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종합목재Ⅵ

한강의 기적을 이끈 정주영 회장
한국전쟁의 폐허 속에서 그야말로 무(無)에서 유(有)를 창조한 정주영 회장. ‘한강의 기적’을 선두에서 이끈 경제적 감각과 놀라운 추진력, 그는 한국이 다른 대기업들과는 달리 창업과 발전의 과정이 한국 경제의 성장과 발전 과정 그 자체였다. 현대그룹은 6.25를 전후해 흔했던 탈법적 수단을 통해 기업을 일으킨 것이 아니라 국가경제의 중추인 기간산업을 일으켜 세우면서 국가와 함께 성장해왔다.
정주영 회장의 창업과 기업경영은 국가와 국민들에게 커다란 공헌을 했다. 경부고속도로 건설 참여, 중동 진출에 따른 외화벌이, 특히 건국이래 최대의 해외플랜트 수주사업이었던 사우디아라비아의 산업항 건설은 한국에서 중공업 발전을 꾀하는 계기가 됐다.

2001년, 창업주 정주영 회장 별세
원자력 발전소 건설, 세계 최대의 조선소 건설, 자동차 산업 중흥 등 한국 경제사에 굵직굵직한 획을 그은 경제인 정주영 회장. 그는 현대종합목재설립과 각종 원목 및 제재목 수입판매, 울산합판공장 건립, 구소련에 산림개발 등 목재산업에도 많은 관심을 쏟았다. 정 회장은 현대그룹의 창업주로 아호는 아산(峨山)이다.

1915년 강원도 통천군 송전리 아산마을에서 아버지 정봉식과 어머니 한성실의 6남 2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가난한 살림살이로 인해 10살 무렵부터 농사일을 했으며 1930년 16살의 나이로 송전소학교를 졸업한 뒤 진학하지 못하고 아버지의 농사일을 도왔다. 가난에서 벗어나기 위해 여러차례 가출을 하기도 했다. 1937년 9월 그의 나이 23살때 경일상회라는 미곡상으로 사업을 시작했다.

1940년 서울에서 경성서비스공장의 직공으로 일하고 있던 친구 이을학 씨의 소개로 ‘아도서비스’라는 자동차 수리공장을 인수하게 된 것을 시작으로 1946년 4월 현대자동차공업사를 설립했고, 1947년 5월에는 현대토건사를 설립하면서 건설업을 시작했다. 1950년 1월 현대자동차 공업사와 현대토건사를 합병해 현대그룹의 모체가 된 현대건설주식회사를 설립했다. 1950년 6.25전쟁 후 점차 늘어가는 건설수요는 1964년 6월 시멘트공장을 설립하게 했고 1970년 1월 현대시멘트 주식회사로 독립했다.

이후 해외 건설시장 개척과 울산조선소 건설, 서산 앞바다 간척사업 등 대규모 사업을 성공적으로 추진하면서 현대그룹은 대기업으로 성장했다. 1971년부터는 현대그룹 회장을 지냈고 1987년 현대그룹 명예회장이 돼 경영일선에서 물러났다. 1992년 초에는 통일국민당을 창당해 대표 최고위원이 됐고, 그해 5월 제 14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전국구 의원으로 당선됐다. 같은해 12월 제 14대 대통령선거에 통일국민당 대통령 후보로 출마했다가 낙선했다. 당시 민자당 김영삼 대통령 후보에게 패배를 했다. 1993년 초 통일국민당 대표 최고위원직을 사임했다. 2000년 5월에는 현대그룹 명예회장직을 사퇴했고 2001년 폐렴으로 인한 급성호흡부진으로 별세했다(향년 87세).
정주영 회장의 다음과 같은 발언이 깊은 감명을 준다.

「대개의 사람들은 좀 어렵다 싶은 일을 해 보겠다는 시도도 안해보고 간단히 ‘안된다’, ‘불가능하다’로 끝내버리고 만다. ‘그렇게 싼 값으로 어떻게 고속도로를 놓느냐’, ‘현대 때문에 한국건설업자 다 망했다’, ‘우리 형편에 조선소 건설이 웬말이냐’, ‘그 엄청난 물량을 바지선에 실어 울산에서 사우디의 주베일 항구까지 해양수송이라니 당치 않다’ 등으로 무엇인가 잘못된 사람 취급을 받은 것이 한두번이 아니었다. 상식 안에서 밖에 생각할 줄 모르는 사람들에게는 모험을 마다하지 않는 내 스타일이 얼마나 황당하고 무지하게 보였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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