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티클보드의 역사 Ⅱ

1972년 6월, 동화기업 파티클보드공장 착공
동화기업, 지금은 목질보드업계의 선두주자이지만 1972년 당시에 동화기업은 제재소에 불과했다. 동화기업(당시 대표 승상배) 역시 제재단지 내에서 발생되는 수많은 양의 죽데기의 부가가치를 높이는 방안을 찾다가 파티클보드공장을 지을 것을 계획하게 된다.
동화기업 승상배 사장(당시 52세)은 미국의 ‘골든스테이트빌딩 프로덕트社’와 합작으로 파티클보드공장을 건설하기로 협약을 맺고 1972년 6월 공장건설에 착수했다.
협약내용인즉 총 사업비를 300만 달러(당시 돈으로 12억6천만원)로 책정했는데 동화기업측은 땅(토지)과 건설비, 인건비 등을 투자하기로 하고 미국회사측은 150만달러 상당의 이계설비를 투자하는 것으로 했다. 즉 동화기업은 인천 북구 가좌동 164의 12,000평 부지를 제공해 건평 2,000평의 공장건물과 1,300평의 창고를 짓고, 미국회사 측은 150만 달러의 기계 설비를 투자해 일산 150㎥(년산 4만5천㎥) 규모의 파티클보드공장을 짓기로 한 것이다. 물론 공장운영은 동화기업측이 하기로 했으며 이익금은 반반씩 나누기로 했다. 그리고 동화기업은 가동후 5년간은 이익금 중 20%를 미국회사에 더 주기로 하고 6년차부터 5년간은 이익금의 40%를 더 미국측에 주기로 해 10년차부터는 동화기업의 소유주가 100%가 되도록 합의했다. 착공한지 7개월만인 1973년 1월, 동화기업의 파티클보드공장은 본격가동에 들어갔다.

생산초기에는 판매부진
이로써 우리나라에는 1965년 가동된 대성목재의 파티클보드공장과 1973년 가동된 동화기업의 파티클보드공장으로 2개의 파티클보드공장이 가동되고 있는데 동화기업은 초기 판매에서는 기존으로 가동되고 있는 대성목재에 밀렸다. 재고는 날이 갈수록 쌓였다.
그러나 승상배 사장은 계속적인 생산을 지시했고, 결국 건조장 창고까지 파티클보드가 가득차는 현상까지 빚어졌다. 당시 돈으로 10억원에 이르는 엄청난 양이 쌓였지만 승상배 사장은 고집을 굽히지 않았다. 동화기업은 판로개척을 위해 파티클보드를 원자재로 사용하는 주방가구업체, 일반가구업체 등의 영업에 총력을 집중했다. 그 결과 가동 4개월 만에 조금씩 주문이 들어오기 시작했고 드디어 1년 만에 재고가 바닥이 났다. 중단없는 추진력으로 시련을 극복한 승상배 사장의 사업적 수완이 통했던 것이다.

1970년대, PB 품질은 엉성
1970년대의 파티클보드 품질은 지금의 파티클보드에 비하면 아주 엉성하기 짝이 없었다. 당시 필자가 경험한 일인데, 파티클보드로 만든 책장을 사서 책을 꽂아 놓았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가로로 놓인 파티클보드(당시 18㎜)는 습기를 받아 밑으로 축 처지는 일이 발생했다. 또 한가지 웃지못할 일이 있었다. 1974년 당시 고속도로 죽전 휴게소에서 한 남자가 두께 20㎝나 되는 두꺼운 바둑판을 팔고 있었는데, 아가티스로 만든 두꺼운 바둑판이었다. 얼마냐고 물었더니 2천원이란다. 당시 대성목재 신입사원 월급이 3만원일 때였으므로 꽤나 비싼 가격이었다. 지금 돈으로 치면 20만원에 해당한다고나 할까. 그래도 아가티스 원목으로 만든 것인데 비싸겠지 하면서 바둑판을 샀다. 그런데 몇 달 후 바둑판의 모서리가 벗겨지면서 안을 살펴보니 파티클보드에 아가티스 무늬목을 랩핑해서 만든 것이었다.

파티클보드공장의 집진고에서 불이 자주 났다
파티클보드공장은 폐목재를 분쇄해서 칩으로 만들어 집진고에 집어넣고 건조시켜 압축공장으로 보내지게 돼있었는데 집진고 상단에는 항상 목분이 많이 쌓였다. 그 목분에 어떠한 열이나 전기 스파크가 가해지면 불이 자주 일어났다. 필자도 대성목재에 근무하면서 파티클보드공장의 집진고에서 불이 나는 것을 여러번 목격한 바 있다.

저작권자 © 한국목재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