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에 동갑내기 규수와 결혼
정태성 회장이 결혼한 것은 3.1운동 한 해 전인 1918년 봄. 그의 나이 20세 때였다. 1907년에 조혼 금지령이 내려지긴 했으나 아직도 14~15세에 결혼하는 풍습이 남아있던 당시로서는 20살에 결혼한다는 것은 좀 늦은 편이었다.

처가는 안동군 녹전면 갈산리 임홍근씨의 차녀 ‘임봉은’이라는 동갑내기 규수였다. 그는 안동으로 말을 타고 장가를 갔다. 잔치는 처가에서 교회식으로 치렀다. 처가에서 며칠 지내고 영주로 신행을 왔다. 그리하여 부모님과 한집에서 살림을 차렸다.

결혼생활은 그럭저럭 행복했고, 정미소도 번창해갔다. 그는 맏아들로서 아버님의 사업을 돕는다는 것에 보람을 느끼며 살아갔다. 결혼한 지 1년 반 만에 장녀를 낳았고(1920) 그로부터 2년 후에 다시 차녀를 낳았다(1922). 연거푸 딸이 태어나니 부모님은 몹시 섭섭해 하셨다고 한다. 그러더니 2년 반 만에 아들을 낳았다(1925). 그 후 차남(1928)과 삼남을 연달아 낳았고 여섯 번째는 딸, 일곱 번째는 아들을 낳았다.

그는 4남 3녀를 낳았던 것이다.
그 일곱 번째 아들이 지금 성창기업의 사장 정해린씨이고, 차남이 선창산업의 회장 정태수씨이다.

영주에서 봉천으로 이사한 후
1927년 그의 나이 28살 때 영주의 미곡상을 처분하고 봉화군 내성면으로 이사를 했다. 그 당시에는 봉화가 영주보다 더 컸었기에 좀 더 큰 곳으로 가서 큰 사업을 해보고자 했던 것 같다.
더구나 봉화에는 그의 아우(정태복)가 먼저 기반을 잡고 여러 가지 사업을 하고 있었음으로 봉화로 이사한 것 같다. 그의 아우는 양조장과 백화점도 경영했고, 운송업도 꽤 활발하게 하고 있었다. 봉화로 이사한 정사장은 처음에는 그의 아우와 사업을 같이 하였었으나 곧 아우와 사업을 분리하고 커다란 정미소하나를 차렸다. 종업원도 1백 명이나 되는 큰 정미소였다. 정미소사업은 그런대로 잘 되서 트럭도 3~4대를 살 정도였다.
그러던 어느 날, 삼척탄광에서 양곡납품을 해달라고 사람이 찾아 왔다. 강원도 내에는 많은 정미소가 있었는데도 그의 정미소를 찾아온 것이다. 정사장은 자기를 찾아와 납품을 의뢰한 삼척탄광사람이 고맙기도 했지만, 왜 이렇게 먼 여기까지 찾아왔느냐고 물었다. 삼척탄광사람은 “소문을 듣자니 정사장이 양곡납품에 가장 차질을 빗지 않을 사람이라고 해서 찾아왔다”고 했다.
봉화에서 삼척탄광까지는 태백산맥의 험준한 준령을 넘어야만 납품이 되는 어려운 일이었다. 그러나 정사장은 자기를 믿고 찾아온 마음이 고마워서 납품을 하겠다고 했다. 삼척탄광이 요구하는 양곡공급량은 월 천여가마의 막대한 양이어서 사업 확장에 큰 도움이 되었다.
당시의 도로사정은 지극히 좋지 않아서 2.5톤짜리 트럭으로 운반하다가 조랑말 등에다가 3가마씩 얹어 나르는 힘겨운 운반을 해야만 했다. 일은 번거롭고 어려워 많은 노력이 들었지만 노력이 컸던 만큼 그에게 돌아오는 보상은 컸다. 양곡대금은 삼천탄광에서 전표를 받아 묵호의 본사에서 찾도록 되어 있었다. 사업은 번창일로였다.

일제말기, 갱목사업에 손을 대다
양곡사업을 하던 정태성 사장은 그의 나이 40을 바라보게 되었을 때 목재와 인연을 맺는 기회를 맞이했다. 양곡공급으로 인연을 맺은 삼척탄광에 갱목을 납품하기 위해서 봉화군 춘양면에 있는 ‘춘양목재회사’를 인수했다. 인수와 동시에 상호를 ‘성창임업’으로 바꾸고 갱목납품과 목재판매를 겸해서 운영했다.

성창임업은 출발부터 아주 순조로웠고 날로 번창해 갔다. 그러나 당시의 시대가 그런 번창을 그냥 두지 아니하였다. 세계 제2차대전이 발발하면서 조선총독부에서는 임산물 수급조절이란 명목하에 총독부가 출자한 자금으로 주식회사를 만들어 강력한 통제에 나섰다. 산림의 벌목량은 총독부에서 정하고 벌목업자도 그들이 선정하여 하청을 주는 한편 수요자들까지 통제하였다. 사정이 이렇게 되자 성창임업은 납품물량도 줄어들고 휴업상태 비슷하게 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이것이 정태성 사장이 조림사업에 투자하는 계기가 될 줄이야. 누가 알았으랴. 그렇지 않아도 갱목을 납품한답시고 산에서 나무를 자르는 것을 항상 마음 아파했던 정사장이였는데, 일본인들의 무자비한 남벌을 목격한 후로는 더욱 조림에 힘을 써야겠다는 생각을 굳히게 되었다.

정태성 회장은 그의 자서전에서 「한 바닥 한 바닥씩 산림이 황폐해 가는 모습을 지켜보며 몰래 눈물진 일이 한 두 번이 아니었다.」고 술회하고 있다. 정사장은 ‘작은 힘이나마 조림에 힘써 황폐해가는 산야를 푸르게 하리라’ 결심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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