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격의 8.15 해방, 그러나
정태성 사장이 47세 되던 해에 8.15 해방이 되었다.

8.15 해방은 온 겨레의 가슴속에 독립된 내 나라를 건설하자는 뜨거운 의욕을 불러일으킨 감격적인 선물이었다.

그러나 해방된지 열흘이 못되서 8.15 해방이 평탄한 앞날을 보장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예고하고 있었다.

38선을 분계선으로 해서 북은 소련군이, 남은 미군이 진주할 것이라는 라디오 뉴스와 함께 사회는 완전히 무정부 상태가 되었다. 공공질서와 경제질서가 전혀 잡히지 않았다. 쌀값이나 생필품가격은 부르는게 값이고, 부르는대로 주어도 살수가 없었다. 치안대가 해산되고 미군정이 실시되었지만 군정세력은 농촌까지 미치지는 못했다.

이때부터 정당 사회단체들끼리 충돌이 시작되었다. 우익과 좌익의 싸움이었다.

조그만 시골 봉화읍까지 영문모를 좌우익 싸움이 번졌다.

해방 하루 전까지만 해도 친구였고 이웃사촌으로 다정하게 지내오던 사람들이 8.15를 맞이하여 열흘도 안돼서 바로 좌우익으로 나뉘어 대대로 원수지간이나 되는 듯 언쟁을 하고 주먹다짐을 해 댔다. 이런 와중에 물가는 천정부지로 마구 치솟았다.
해방된 날부터 1년사이에 쌀값이 천배나 올랐다. 쌀값이 이렇게 폭등한 것은 근본적으로 식량이 부족한 탓도 있었지만, 일제 총독부가 해방되기 전날부터 보름동안 무려 72억원에 달하는 화폐를 찍어보낸 것도 큰 이유였다.

쌀값을 비롯한 모든 물가가 뛰니까 반대로 폭락이 되는 것은 토지가격이었다.
더구나 38 이북을 점령한 소련군과 김일성 일당이 백여만 정보의 토지를 몰수했다는 소문이 나돌자 토지가격은 더욱 폭락이 되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정태성 사장은 자신이 할 수 있는 새로운 사업을 찾기 위해 서울로 가보기로 했다.

1946년 초가을의 스산한 바람이 불 때였다. 서울역에 도착한 정태성 사장은 남대문을 지나 여관으로 가는 거리에서 너무도 혼란하고 살벌한 광경을 목격하게 된다.
신탁통치에 대한 반대시위와 찬성시위가 거리를 휩쓸며 유혈사태를 일으키고 있었던 것이다.

합판제조업에 손을 대다
정태성 사장은 서울에 있는 동안 평화여관에 묵었다.

당시 무교동에 그의 아우집이 있었지만 여러 가지 사정으로 여관에 묵었던 것 같다. 여관 생활을 하면서 정국의 변화와 경제동향, 사회 움직임을 살피기 위해서이기도 했다.

시국의 변화를 알지 못하고서는 무슨 사업이든 섣불리 손을 대서는 안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던 어느날 정태성 사장은 평소때 알고 지내던 권태희 목사를 만나게 되었다. 오랫만에 만났는지라 시국담도 나누고 앞으로 무슨 사업을 하는 것이 좋을까 하는 얘기도 하였다.
권목사는 합판제조업을 해 보는게 어떠냐고 했다.

“정사장, 기왕에 목재사업을 해 왔으니 합판제조업을 해보는게 어떻겠소? 내가 잘 아는 유장로가 합판공장을 세우려고 일본인 기술자와 협력해서 기계를 만들었으나 자금사정이 나빠져서 그 기계를 팔려고 내 놓았다는 구료, 그 기계를 사서 합판공장을 지어보시지.”
정태성 사장은 뜻하지 않던 제의에 놀랍기도 하고, 합판제조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아는 바가 없어 망설였다.

권목사의 권유를 듣고 하루종일 곰곰이 생각하니 장차 건설사업이 활발하게 될 우리나라 여건을 생가하면 합판제조업이 장래성이 있고 전망이 밝을 것으로 생각됐다.

다음 날 권목사를 찾아가서 그 기계를 보러가자고 했다.

그 당시 합판은 저질품으로서 접착성이 매우 약한 합판이 시중에 나돌때이었다. 그러나 해방직후인 만큼 그런 합판마저도 구하기가 힘들었고 수요는 무진장일 때였다. 그러나 수요가 많다고 해서 무턱대고 사업을 하기가 좋은 것만은 아니었다.

원자재인 원목의 구입이 아주 어려운 실정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태성 사장은 원목구입이 어렵다고 해서 장래성이 있는 사업을 마다할 수는 없다고 생각하고 유장로의 기계를 보러 가자고 했던 것이다.

성창합판은 처음에 대구에 세워졌다
권목사의 안내로 아현동 로타리 근처에 있는 유장로의 공장으로 갔다.

점포였던 듯한 집안에 기계들이 여기저기 놓여진채 흐트러져 있었다.

합판을 만드는 기계라니까 욕심이 났지만 기계에 대해서 아는 것도 없고 점검을 해 볼 수도 없었다. 다만 기계의 분량이 너무 적은거 아닌가 싶었지만, 권목사와 유장로를 믿고 사기로 결정을 한다.

그러나 어디에다 공장을 건립하느냐 하는 것도 결정이 안된 상태였다.

정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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