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age_View“10년은 배워야 문짝하나 짠다던데, 2년 만에 배울 것이 없더라.”

지난 2004년 우리나라 목재창호 부문 세 번째 명장이 된 가풍국(59세) 선생은 1964년 19살 때부터 목공과 인연을 맺어 한평생 나무와 함께 살아 온 인생이다.

충남 서산이 고향인 선생은 어머니 별세 후 무작정 상경해 서울의 건축현장에서 목공일을 접하게 됐다. 군대를 다녀온 후에야 본격적인 목수의 길을 택했는데, 남들이 10년은 배워야 가능했다는 문짝 짜는 일이(유난히 손재주가 많던) 그에게는 2년 남짓한 고생을 끝으로 배울 것이 없었다.

그는 기술보다 이론을 배우기 시작했다. 1972년 건설기능공 직업훈련소를 수료하고 건축목공기능사 2급 자격증을 딴 것을 시초로 목공과 창호분야 1급 기능사 자격증까지 목공예 분야 10개의 모든 자격증을 섭렵하면서 지난해 명장의 자리에 오를 수 있었다. 특히 5차례의 고배 끝에 1997년 따낸 목공예 기능장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고.

선생은 ‘외력에 저항하는 문짝’을 만들어야 한다고 고수한다. 나무의 휘는 성질과 원리를 파악하고 그 나름대로 적절하게 이용하는 것을 일컫는다. 특히 온도 및 외부의 빛에 대한 목재의 영향을 최소화 하고 있다.

특히 화목으로 치부되던 국산재를 이용해 ‘원목 나이테 상감도’를 문짝에 적용시킨 선생의 작품은 발명특허와 함께 국산재의 아름다움을 잘 표현하고 있다.

“아파트 공원이나 도로 매설 때 잘려나가는 국산재를 재활용 했는데, 진정한 고부가가치 창출이란 이런 것 아니겠느냐”며 재목의 가치는 없어도 공예가치는 많은데도 화목으로 치부되는 현실이 안타까울 뿐이라고 덧붙인다.

선생의 큰 업적중 하나는 소중한 우리나라 100개 수종을 수집해 기증하는 일이다. 서울 한양공고 목공과, 전남의 성화대학교 건축과, 인천 문학경기장 문학박물관 등에 기증된 이 표본의 이름은  ‘아끼자 사랑하자 소중한 우리나무들’이며, 길이는 가로×세로 3m×2m다. 이달 중 완공되는 매장에도 이 표본을 전시할 생각이다.

인천 주안동에 자리한 삼성종합목재가 선생의 작업터이며, 연구소인 동시에 삶의 자취다. 60평짜리 낡고 초라한 목공소이지만, 그의 60년 인생이 소중한 작품으로 세상에 나온다.
그리고 후진양성이 무엇보다 힘든 목공예 분야인데, 나무를 자식보다 사랑한다던 선생의 아들이 군을 제대하고 아버지의 뒤를 잇고 있다. 누구보다 심하게 반대했던 게 선생인데, 배고프고 대접받지 못하는 일을 택하고 곁에서 묵묵히 대패를 드는 아들이 지금은 든든하다.

선생은 혹 찾아올 손님을 기다리지 않게 한다며 5분 남짓한 곳에 거처를 마련하고 부인 이종순(56)씨와 아들, 딸과 행복한 삶을 그려내고 있다.

장민우 기자 minu@woodkore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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