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0년대 후반은 우리나라 원목개발업체들의 해외진출이 러시아워를 이뤘던 시기였다. 동화개발, 남방개발, 경남개발이 연달아 인도네시아로 진출했다.
동화개발은 발릭파판에, 남방개발은 반잘마신에, 경남개발은 타라칸에 각각 진출했다.

당시는 대학을 졸업하고 해외업체에 취업하는 것을 상당한 긍지로 여길 때였다. 해외에 나가는 것이 하늘의 별따기 만큼이나 어려운 시절이었으므로 비록 그 하는 일이 밀림 속을 헤치고 다녀야하는 힘든 일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해외에 나가서 근무한다는 것만으로도 자랑스러운 일이었다.

그 무렵 석탄공사 과장으로 있던 최명행씨(작고, 서울농대 임학과 출신)는 남방개발의 과장으로 스카웃됐다.

석탄공사에서 익힌 항공써베이 기술을 인정받았기 때문이었다. 남방개발에서도 항공써베이 임무를 다년간 성실히 수행해오던 최명행씨는 어느 날 자카르타에 들렸을 때 우연히 인도네시아 정계의 실력가 붕도모라는 사람을 만났다.

그는 폰티아낙에 위치한 좋은 임지의 산림개발권을 따낼 수 있으니 그 임지를 개발하자는 제의를 했다. 최명행씨로서는 원목개발을 해볼 수 있는 좋은 기회를 맞이했으나 투자할 자본이 없었다. 폰티아낙의 삼림상태를 면밀히 점검한 최명행씨는 그길로 남방개발에 사표를 내고 원목개발사업에 뜻이 있는 한국업체를 찾아 나섰다.

이때 인천에서 신흥목재와 우아미가구를 운영하던 재력가 이훈돈 사장을 만났다. 제재소와 가구회사를 운영하면서 원재료(원목과 합판) 구입에 애로가 많았던 이훈돈 사장은 최명행 씨의 설명을 듣고는 마침내 원목개발사업에 투자할 뜻을 밝혔고 그렇게 해서 생긴 회사가 ‘아주임업’이다.

인도네시아의 정치실력가 붕도모와 한국의 재력가 이훈돈 사장과의 합작법인인 아주임업이 폰티아낙에 설립된 것이다. 사장은 최명행씨, 부사장은 붕도모씨가 맡기로 합의했다. 생산담당인 캠프매니저에는 한상욱씨(서울대 농대 임학과 출신)가 발탁됐다.

‘아주임업’의 임지는 폰티아낙 항구로부터 내륙쪽으로 600㎞나 들어간 지점에 위치하고 있었다. 다행히도 그 임지로부터 까부스강이 폰티아낙까지 흐르고 있어서 생산된 원목을 수출할 수 있는 임지였다. 생산된 원목을 라켓으로 만들어(당시는 라왕을 주로 생산할 때였으므로 거의가 뜨는 나무였다) 탁보트로 끌면 일주일씩이나 걸려 폰티아낙항구에 도착해서 선적을 해야하는 난코스의 임지였다.

당시 임지로서는 악조건의 임지였으나 그런대로 생산도 순조로웠고 수출도 순조로웠으며 사업도 잘 돼갔다. 그러던 어느날 인도네시아측 사업파트너인 붕도모가 구속당하는 일이 생겼다. 야당편에 서서 반정부운동을 벌리다가 구속된 것이다. 구속된 붕도모는 감옥에서도 계속 돈을 요구했고, 최명행씨로서는 열심히 일해서 붕도모에게 돈만 주는  것에 대한 불만이 쌓여갔다.

결국 아주임업은 동업자간의 불화로 설립된지 5년 만에 문을 닫았다. 1987년, 필자와 함께 타라칸에 갔었던 최명행씨의 회고담이다.

“지금 생각하면 후회가 많이 돼요, 당시 붕도모가 요구하는 돈이 거액도 아니었는데, 달라는 대로 다 주더라도 사업을 계속 했어야 했어요. 자동차도 사장차와 같은 레벨의 차를 사겠다고 할때 그것도 들어줄 것을 괜히 반대했어요.”

글; 김상혁 / shkim@witconsulting.com
      한국목재컨설팅 상임 컨설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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