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정에 있던 사람들은 한결같이 설봉을 부러워했다. 당시 조선인, 게다가 북간도 사람으로는 꿈도 꾸기 어려운 명문학교, 일본의 고베고상을 졸업하고 누구보다도 많은 월급을 받는 좋은 직장에 취직해 있는 설봉이 그들에게는 선망의 대상이 되기에 충분했다.

북간도 출신으로는 드물게 보는 출세였던 것이다.
그러나 막상 당사자인 설봉은 그렇지가 않았다. <조선일보>의 취직살이는 그야말로 지겹고 과분한 일과의 연속이었다. 취직살이에 대한 회의도 이때 시작된 것이었다. ‘내가 아무리 생활이 궁하다해서 평생 이것을 해야만 하나’라는 생각에 늘 마음이 어지러웠고 따라서 일손이 잘 잡히지 않았다.

이 때가 1936년이었으니까 그의 나이도 이제는 벌써 장년기에 접어든 36세였던 것이다. 그렇다고 국내 사정이 평탄한 것도 아니었다. 당국의 통제는 날이 갈수록 심해지더니 ‘미나미’란 자가 조선총독으로 새로 부임한 1936년 부터는 탄압정책이 더욱 강화되었다.

세상이 이러니 조병욱씨 같은 사람은 시골로 아예 낙향을 해 버렸는데 설봉은 반대로 시골서 서울로 올라왔으니, 자신이 한 행동에 대해서 후회를 하기도 했다. 이런저런 생각에 시달리던 설봉은 북간도가 만주사변 이후 만주국이 수립되면서 경기가 좋아졌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래서 설봉은 당장 북간도로 떠날 것을 작정했다.

다시는 월급쟁이 생활을 안하리라 굳은 결심을 하고 1년 반가량 몸 담았던 신문사에 사직서를 제출하고는 아직도 부모님이 살고 계신 북간도로 발길을 옮겼다. 오랜만에 북간도에 들렀더니 부모님의 생활형편은 비참할 정도로 엉망이었다.

부친은 광산을 하다가 오히려 큰 빚을 지고 쩔쩔매고 있었으며, 모친은 이런 살림을 꾸려나가느라고 전도부인까지 하면서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동생 택완은 어느 개인 상점에 다니면서 받는 월급 15원으로 온 식구를 돌보고 있었다. 좁쌀 살돈마저 없어서 겨우 한자루 사다가 그다음 장날까지 먹고 있었다.

땔감이 없으니까 말똥을 말리고 쌀겨를 풍기로 불어 불을 지펴 쓰고 있었으며, 썩은 콩을 밥에 넣어 먹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설봉은 고베고상 동창인 지우선씨와 사업을 하기로 결심했다. 잣을 가을에 사서 저장해 뒀다가 이듬해 봄에 팔면 이익을 보지 않을까 생각해서, 금융조합을 그만둘 때 받았던 퇴직금을 출자해 잣장사를 시작해 보았다. 그로서는 첫 사업인 셈이다.

그러나 이 첫 사업에서 그리 재미를 보지 못했다. 예상한 만큼 잣값도 오르지 않고 품질도 변질되고해서 실패를 하고 말았다. 다음에는 쌀 장사에 손을 대어 보았다.

추수기의 쌀값과 다음해 여름철 쌀값의 가격차이를 노린 장사였는데 이 장사에서는 상당한 재미를 보았다. 이제까지 기껏해야 100원 남짓한 월급을 받아왔던 그가 한달에 천여원하는 거금을 손에 쥐게되니 세상이 온통 제것만 같았다.

쌀 장사에 재미를 본 설봉은 소장사에도 손을 뻗쳤다. 남만주 지방의 소값은 싼 반면에 용정의 소값은 상당히 비싸다는 것에 착안해서 소장사에 투자했던 것이다.

글 ; 김상혁 / shkim@woodconsulti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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