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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시는 1999년 4월에 시작해 2006년 12월 까지 부산시 기장군 정관면 일대에 택지조성사업을 시행 중이다.

울산대학교박물관은 지난 2003년 5월부터 정관면 용수리 일대를 조사한 결과, 삼국시대 굴립주(掘立柱) 건물과 반수혈주거지 등을 발굴했다. 주거지에는 벽을 따라 구들과 아궁이가 있으며, 아궁이 주변에서 시루와 항아리 등이 발견됐다.

그동안 삼국시대 주거지 발굴사례는 학계에 몇 차례 보고된 적이 있으나 마을 전체가 확인되거나 비교적 뚜렷한 유구 흔적이 나온 것은 이번이 처음이며, 이에 따라 당시의 건축기법이나 구조물 배치 등 생활상 파악 연구에 새 전기가 마련될 것으로 보이는 곳이다.

기장(機張)이란 명칭은 통일신라 경덕왕 16년(757)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계속 한자음(漢字音)으로 사용되고 있다.

기장이란 명칭을 사용하기 이전에는 ≪삼국사기≫ 권34, 잡지3 양주 동래군조에 갑화양곡(甲火良谷)에서 기장으로 개명됐다고 기록하고 있으므로 갑화양곡이라 불리어졌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기장은 ≪고려사≫ 권57, 지리2 양주조에 다른 이름으로 차성(車城)이라고도 기록되어 있으므로 차성이라고도 불리어졌음을 알 수 있다.

이 곳에서 대규모 삼국시대 마을 유적(4~7세기 추정)이 처음으로 확인되어, 주거지에는 불을 땐 흔적과 난방시설, 우물 등이 출토됐으며 탄화미(炭化米), 복숭아 씨앗과 박씨 등 각종 유기물도 채집됐다. 또한 국내 최초로 삼국시대의 목재신발이 바가지 등 생활용품과 함께 출토됐다.

김영민 울산대박물관 학예사는 “가동유적지는 지금까지 발굴된 삼국시대 마을 유적 가운데 보존상태가 가장 좋다”며 “삼국시대 지역의 마을 배치 형태, 인구 수 등 다양한 연구가 가능할 것”이라고 말했다.

마을을 가로지르는 실개천이었던 것으로 추정되는 저습지에서 나온 목재신발은 길이 23㎝, 너비 8㎝의 크기로 오른발에 신었던 것으로 추정되는 것이었다.

가장자리에는 9개의 구멍이 뚫려 있어 끈을 이용해 신발을 발에 묶는 현재의 샌들과 비슷한 기능을 했던 것으로 보이는 이 목재신발은, 뒤축 부분을 제외하면 온전한 형태를 유지하고 있을 정도로 상태가 양호했다.

Image_View우리나라 전통 신발은 성별, 신분, 복식, 직업, 재료, 형태에 따라 그 종류가 다양한데 재료에 따라 구분하여 보면 피혁,  초본, 천, 놋쇠, 종이, 나무 등이었다.

또한 전통신발은 그 생김이나 종류에 따라 크게 둘로 나눌 수 있는데 화(靴)와 이(履)이다. 화는 북방계통에서 유래된 신으로 지금의 장화 같은 것으로 긴 신을 말한다.

이는 남방족 계통의 신으로 신목이 짧은 신의 총칭으로 화를 제외한 신발을 총칭하는 일반적 의미를  갖는다.

나막신은 중국에서는 극()이라 했고, 한국에서는 목혜(木鞋)라 부르다가 조선 후기에는 나막신이라 했다. 처음에는 편편한 나무바닥에 끈을 매어 발가락이나 발끝에 걸고 다녀 일본의 게다와 비슷했으나, 차차 발달해 다른 신 모양과 같아지고 다시 여러 가지 맵시를 내게 됐다. 일본의 게다는 한국의 나막신, 중국의 극이 원류이다.

조선시대의 경우 대개 소나무나 오리나무를 파서 신과 굽을 통째로 만들었는데, 남자용은 좀더 투박하였으며, 여자용은 측면에 여러 가지 무늬를 그리거나 코를 맵시있게 팠다. 굽 끝에는 중국의 극처럼 쇠로 된 발을 붙여 닳는 것을 막기도  했다.

발굴된 유물 증거들을 바탕으로 인간의 문화적, 사회적 행위들을 추론해 내는 고고학에서는, 시대의 변천을 당 시대의 인류가 사용하였던 주요한 도구로 구분하여 석기, 청동기, 철기시대로 구분한다. 그러나 인류가 최초로 사용한 도구는 사실 석기보다는 목기였다.

나무는 돌과 함께 인류가 최초로 사용한 도구의 재료 였으며, 이후로도 영원히 함께할 재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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