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봉은 신참에서 멀지 않은 육가자(六家子)라는 역에서 약 10리를 들어간 곳에 약 5백정보의 무인지답을 샀다. 이 땅은 예전에 청나라 사람들이 살던 곳으로 만주사변때에 일본군에 의해 점령된 곳이었다.

설봉은 여기에다 대단위 농장을 건설하기로 결심하고 일에 착수했다. 당시 만주에는 마적들의 횡포가 심하였으므로 마을을 만들려면 토성이나 석성을 쌓고 망대를 세우는 것이 우선적인 일이었다. 우선 넓이 12척, 높이 12척의 토성을 쌓았다.

그리고 농민들에게 집 지을 자금을 대 준다고 하니까 청나라 사람 130호가 들어왔다. 조선 농민들에게는 집 지을 자금 외에 농우까지 마련해주고 약 30호를 입주시켰다.

만주는 겨울이 긴탓으로 가을에 추수한 뒤로는 기나긴 겨울을 술먹고 노름을 하는 것으로 재산을 탕진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이를 생각하고 설봉은 농장 농민들에게 축산을 권장했다.

이러는 중 전쟁은 막바지에 접어들고 전세는 일본이 패배할 기미가 보이기 시작했다. 일본이 패망하면 이제껏 해왔던 모든 노력이 수포로 돌아가기에 설봉은 농장을 정리하고자 했다.

그러나 원매자가 선뜻 나서지 않았다. 겨우 만철에 교섭해 50만원에 팔기로 결정했다. 대금지불기일이 8월8일이었는데 일본의 패전으로 돈을 받아내지 못했다.

정미소와 농장경영에 몰두하며 북만주를 누비고 다니던 설봉은 우연한 기회에 명태장사에도 손을 댔다. 이때가 1941년이었는데 만주에서는 해산물이 매우 귀한 때문이었다. 더욱이 전쟁이 가열되면서 만주에서는 해산물을 찾아볼 수가 없을 정도로 해산물이 귀했다.

당시 만주의 큰 도시에는 지금의 고시가격과 비슷한 제도가 있어서 일정가격 이상 받을 수 없도록 돼있었고 이를 위반할 때에는 처벌을 받도록 돼 있었다.

그런데 번양(藩陽)역에서는 고시가격제도가 없어서 그 곳으로 해산물을 수출해서 팔기도 했다. 그러다가 철도경찰에 끌려가 유치장 신세를 지기도 했다. 번양이 봉천시에 편입된 사실을 모르고 장사를 하다가 고시가격위반으로 붙잡혀갔던 것이다.

이런 일이 있은 후 얼마 지나서 북경이나 천진에는 고시가격제도가 없다는 것을 알아내고 북경이나 천진 등으로 수출을 하기로 했다.

수출절차가 까다로왔으나 화신과 교섭을 해서 천진출장소 명의로 명태 수출허가를 얻어 수출하는데 성공했다. 14차분의 건명태를 천진에 끌어내리니 굉장한 분량이었다. 모두들 깜짝 놀랐다.

그러자 소문이 사방에 퍼지면서 천진과 북경에 있는 조선인 거간꾼들이 저마다 팔겠다고 나서는 것이었다. 한 쾌를 8원씩 팔아주면 구전으로 거기에서 1원씩 주기로 약속했다.

그래서 팔기 시작한 것이 며칠 사이에 전량을 모두 팔아 치울 수가 있었다. 명태 한쾌에 투자된 돈이 운송비까지 합쳐 1원15전이었으니까 구전을 제하고도 엄청난 돈이 들어오게 되었다. 명태장사로 번 돈이 70만원이란 거액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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