빚에 몰린 설봉은 비밀리에 서울을 빠져나와 홍콩 행 비행기를 탔다.

때는 1948년 4월, 설봉은 해방후 처음으로 해외 여행을 하는 셈이었다. 설봉은 홍콩에 도착하자 우선 뉴욕 내셔날 시티뱅크 홍콩 지점을 찾아갔다. 이 은행은 설봉이 일본 고베에 있을 때 근무한 경험이 있는 은행이었을 뿐만 아니라 한국은행 고문으로부터 미리 소개장을 받아왔기 때문이었다.

설봉은 소개장을 내어놓고 협력을 구했다. 그랬더니 지점장은 선뜻 홍콩에서 가장 실력있는 지물상인 치생공사(治生公司)를 소개해 주는 것이 아닌가.

홍콩 지점장은 설봉에 대한 첫 인상을 좋게 느꼈던 모양이다. 그 즉시로 설봉은 홍콩의 치생공사와 계약을 체결하고 무역을 시작했다. 방법은 물물교환방식이었는데 치생공사가 지물을 선적해 서울에 보내면 천우사는 대신 오징어를 사서 그 배에다 실어 보낸다는 조건이었다.

그러니까 지물 대금을 먼저 치를 필요없이 오징어를 사서 실으면 되는 장사였다.

드디어 신문용지 50톤을 실은 첫 배가 부산에 도착하였다. 그러자 국내에 있던 천우사 사원들은 이리 뛰고 저리 뛰고 해서 지물을 팔고 그 돈으로 오징어를 구해 그 배에 실어 보냈다.

이러기를 3개월동안 계속하니 빚의 3분의 1을 갚을 수 있게 됐다.

설봉은 홍콩에 피신해 있으면서 계속 지물을 실어 보냈다. 한편 치생공사는 황옥당이라는 사람을 한국에 파견해 천우사의 무역업무를 감독케 하였다.

이런 식으로 무역을 6개월간 계속한 결과 빚의 절반을 갚을 수 있었다.물물 교환단계를 벗어나지 못하는 무역이었지만 서로 믿고 했기 때문에 번거롭지도 않고 사업도 잘 돼 좋았다, 치생공사는 천우사의 은인이나 다름없었다.

날이 갈수록 치생공사와의 무역은 더욱 번창해져서 한때는 전국 지물 수입량의 거의 절반을 천우사가 차지 했다.

1948년 8월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자 한국의 무역에도 변화가 일기 시작했다.홍콩 일변도의 무역에서 대일 무역이 시작된 것이다.

그리고 또 하나의 행운이 설봉을 찾아왔다. 어느날 유동석이란 사람이 찾아와서 조선농회(朝鮮農會, 오늘날 농협과 비슷한 기관)에서 수집한 가마니 수십만장을 일본에 수출할 수 있는 허가를 받아 줄 수 있으니 그걸 한 번 해 보라고했다.

그런데 그 때 조선농회 농회장을 최태용씨라는 사람이 하고 있었는데 최태용씨는 영흥 사람이었고 설봉이 영흥에서 금융조합이사로 있을 때 어느정도 안면이 있는 사이여서 어렵지 않게 천우사가 대일 가마니 수출업자로 지명될 수 있었다.

당시 농회에서 수집해 놓은 가마니를 체크해 보니 그 양을 다 일본으로 실어 나르려면 배가 17척이나 필요한 방대한 양이었다.

일본의 수입상은 제일물산이었는데 1949년 한 해는 온통 가마니 수출로 돈을 벌다 시피했다. 해방 후 민간 무역으로 일본과의 교역은 이것이 처음이었으며 그때 가마니 수출대금은 약 30만 달러에 이르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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