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 인도네시아는 원목수출 중단을 선언하고 자국의 자원으로 스스로 합판을 만들겠다고 나섰다. 인도네시아 정부는 많은 해외 투자를 끌어들이기 위해 자국에 외자를 투자하는 자에게 많은 인센티브를 제공하겠다는 홍보 활동을 시작했다.

세금을 감면해 주겠다던지, 과실송금을 확실히 보장해 주겠다거니 하는 내용들이었다. 다소 불리한 내용도 있었다. 현지인을 100% 고용해야 한다거나 합판 공장 건설 후에는 제재 공장을 꼭 건설해야 한다던지….자국 사람의 고용을 위한 정책이기도 했다.

기계는 100% 새 기계를 가져와야 된다고 돼 있었으나 당시 인도네시아에 투자하는 회사들은 국내의 헌 기계를 사서 페인트를 칠해 마치 새 기계를 가져오는 듯한 편법을 쓰는 수가 많았다.

당시 효성물산 산하에 있던 대성목재도 원자재 가격상승으로 계속되는 적자에 시달려서 인천공장을 팔고  인도네시아로 진출해야 되느냐 마느냐를 놓고 저울질하고 있을 때였는데 편경종합목재는 재빨리 스마트라의 나타할에 합판공장을 짓고 진출했다.

동화개발이 반잘마신에 코린도(Korindo)라는 합판 공장을 건설한 것도 그 무렵이었다. 그후 선경은 1985년에 말레이시아에도 합판공장을 건설했다.

사라와크 미리(Miri)에 삼링과 합작으로 삼링합판(Samling plywood )을 건설했던 것이다.

비록 삼링이라는 원목개발 업체와의 합작공장이기는 했지만 선경은 그것으로도 양이 안찼는지 1990년에 들어서는 가이아나에 합판 공장을 건설하겠다고 검토에 나섰다.

1990년 초 어느날 (필자는 주식회사 코마라는 원목수입상을 하고 있을 때 였는데) 선경의 해외 개발사업부에 이사로 있는 이상언씨(서울대 상대 대성목재 출신)로부터 전화가 왔다.

이상언 씨는 대성목재근무 당시 말레이시아 타와우 주재원으로서 필자에게 타와우 주재원을 물려주면서 인수인계한 적도 있는 선배로서 필자와는 절친한 사이였다.

“당신이 79년도에 가이아나에 갔다왔죠? 그때  가이아나 나무가 어떻든가요? 우리가 가이아나에 합판공장을 설립하고자 하는데 어느 수종이 합판재로 가능할지 와서 좀 봐 줄 수 있겠느냐”는 것이었다.

그때가 1월 초였는데 을지로에 있는 선경본사에는 주차할 곳이 마땅치 않을 것 같아 전철을 타고 부지런히 갔다.

사무실에는 이상언 이사 외에도 정기택 부장(당시해외 사업부 부장)도 와서 있었다. 여러 가지 원목 샘플을 내 놓은 것 중에서 바로말리(Baromalli)라는 수종이 합판재로 가장 좋을 것 같아 “이 나무로 합판을 만들면 좋겠네요”라고 했다.

선경은 해외 투자 추진 속도가 항상 빨라서 1993년인가, 정기택 부장이 가이아나 현지 법인 사장으로 나가게 됐다고 전화가 왔다. 정기택씨는 필자와는 동기동창이라 동기생들끼리 신촌에 모여 환송회를 해 준 기억이 난다.

신촌 어디선가 저녁을 먹은 후 2차는 필자가 내기로 하고 한남동에 있는 술집엘 갔다.

그 집은 맥주를 팔면서 나체쇼를 전문으로 하는 집이었다. 당국의 단속이 심할 때는 앞문은 잠겨있고 앞문 앞거리에 여 종업원이 나와 서 있다가 아는 손님이 서성거리면 뒷문 쪽으로 안내해 조그만 철문을 열어주는 곳이었다.

김상혁 / shkim@woodkore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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