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0년 6월25일 6.25동란이 일어났다. 설봉은 동남아 순방을 마치고 귀국하여 숨도 돌리기 전에 청천벽력과 같은 6.25를 당해 피난길에 나서야했다.
당시 피난길은 돈 많은 사람과 돈 없는 사람의 피난길이 조금씩 달랐지만, 그 고생이란 다 같이 이루 말할 수 없는 것이었다.


필자도 당시 10살이었는데 어머니(당시32세)와 함께 피난길에 나선 것이 생각난다. 필자는 당시 돈암동에 살고 있었는데 마포 나루터까지 걸어가서 나룻배를 타고 한강을 건넜던 것이 기억난다. 한강을 건넌 후 영등포 역까지 걸어가서 부산행 기차를 탔다. 당시 기차에는 복도에 선 사람, 기차 지붕에 올라탄 사람 그야말로 아우성이었는데 다행이었는지 우리는 좌석에 앉아서 가고 있었다. 기차가 서서히 떠나서 시흥쯤에 갔을 때 기총 소사를 받아 모두들 좌석 바닥으로 엎드리고 한 동안 기차가 가지 않는 것도 경험했다.
당시 기업체의 사장이었던 설봉의 피난길은 어떠했는지 설봉 자신이 쓴 회고담을 통해서 살펴보자.

 
‘6.25 사변이 터진 것은 일요일이었다. 천우사는 6월24일 인천항에 신문지, 양복지등 대규모 수입물자를 들여왔으나 그 날이 토요일이어서 통관을 월요일(6월26일)로 미루고 있다가 6.25를 당했다. 나는 6월25일 조선일보사 3층에 있는 천우사 사무실로 나갔다. 신문사 기자들이 들어와서 전황이 아주 불리하다고 떠들어댔다. 그때 국방부 작전과장으로 있던 예관수씨로 부터 전화가 왔는데 도저히 희망이 없으니 피난을 가는 것이 좋을 것이라고 했다.


나는 조선일보 사장 방응모씨 방으로 올라가서 예관수씨 말을 전하고 역시 피난 가는 것이 좋겠다고 했다. 그리고 주머니에 있던 13만원을 방응모씨에게 주면서 빨리 피난 가라고 권하고 나도 피난을 가기로 결심했다. 그러나 방응모씨는 피난을 가지 않고 그대로 남아 있다가 끝내 공산군에게 납치 당하고 말았다. 나도 피난을 가기로 결심은 하였으나 나를 불안하게 하는 것이 하나 있었다. 여수, 순천 반란 때 이북 말을 하는 사람들은 모두 죽였다는 소문이었다.
그 말을 들으니 안심하고 남쪽으로 피난 갈 수만도 없는 일이었다.
그래서 우와 좌왕 하고 있는 판에 당시 노동운동을 하던 최규환씨라는 사람이 오더니 공산군이 이미 서울에 들어왔고 또 한강 다리도 곧 폭파 될 것이라고 했다.
그 말을 듣고는 6월27일부랴부랴 가족들과 함께 노량진에 있는 조선일보 부사장 최용진씨 댁으로 갔다. 그 날밤 11시쯤 최용진 씨 집에서 유엔군이 참전하였다는 라디오 방송도 들었고, 한강 인도교가 폭파되는 폭음도 직접 들었다.


우리는 그 날밤 수원까지 걸어서 갔다. 지금의 국립묘지가 있는 자리를 지나 과천 쪽으로 가는데 캄캄한 밤중에 피난민들이 한강을 건너다가 물에 빠져서 “사람 살려”라고 아우성치는 소리가 이곳 저곳에서 처참하게 들려왔다. 천만 다행히도 우리 일행은 수원에 무사히 도착해서 나의 과수원에서 하룻밤을 자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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