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대 후반부터 1990년대 초반까지는 원목 수입상들의 춘추 전국시대라고 볼 수 있다. 인천에만도 원목수입상이 100여개가 넘었기 때문이다.

원목수입상의 효시는 삼미사라고 볼 수있다. 삼미사는 1960년대 후반부터 북미재를  수입해서 시판을 해왔다. 그 후 효성물산이 칠레원목을 수입해서 시판을 했고, 삼성은 뉴질렌드 원목을, 국제상사는 러시아원목을, 그때는 회사마다 그 나름대로 특성을 살려서 수입을 한 것 같다.

그러던 중 1970년대 후반 효성물산이 가장 먼저 동남아 라왕원목 수입에 손을 대었다.
그러나 1978년 겨울, 심한 혹한이 불어닥쳐 동화개발호에 저장해 두었던(당시 해상벌목장이 없는 회사들은 모두 동화개발호를 이용하였다.) 라왕들이 모두 얼어 터졌다.

효성물산은 이듬해 봄철에 그 나무를 처분하느라고 큰 손해를 보았다. 그리고나서부터 효성물산은 남양재원목 수입을 다시는 하지 않았다. 그런데 현대 종합목재는  칠레원목,뉴질랜드원목, 남양재 등 닥치는 대로 수입을 해댔다. 그러나 현대 종합목재도 남양재 수입에서만은 재미를 못 본 것 같다.

그도 그럴것이 남양재는 매월마다 원산지 가격이 변하고, 국내 시판 가격도 자주 변하기 때문에 큰 회사의 결재라인으로는 재빨리 대응하지 못하는 단점이 있었다. 그러나 규모가 적은 원목수입상들은 재빨리 대응할 수 있는 장점이 있었기에, 당시 남양재원목은 주로 작은 수입상들이 장사를 했고 그 수도 부지기수로 많았다.

90년대 초까지만 해도 말레이시아 코타티나바루행 비행기를 타러 김포공항으로 나가면 로비에서부터 아는 목재상 사장들을 근 10여명은 만나게 된다.

당시 필자는 미리(Miri)에서 원목을 수입할 때였는데 미리에 도착해서 한국 사람들이 잘 묵는 그랜드호텔에 방을 잡고 보면 한국수입상들을 대 여섯명은 만났다. 그때 자주 만났던 사람이 김보규씨,인천목재의 홍상무, 동양목재의 김태규씨 등이었다.

1991년으로 기억된다.
당시는 필자가 직접 원목 검목을 하러 다닐 때이었는데 미리(Miri)에 가면 합판회사의 주재원들은 주로 후배들이어서 서로 수인사를 해야만 알게되는 수가 많았다.

그 때만해도 저녁 식사 때가 되면 shipper와 저녁약속이 없는 한 합판회사 주재원들과 서로 서로 연락해서 식사를 같이 하는 수가 많았다.

그 당시 미리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저녁 식사는 선창산업 주재원 조창근씨 집에서의 식사였다. 강원대학교 임학과를 나왔다고 자기 소개를 하면서 1985년에 필자로부터 남양재원목 강의를 들었다고 했다. 그래서 필자를 자기 집으로 초대해서 저녁 식사를 한끼 꼭 대접하고 싶다고 했다.

그날 필자는 당시 대성목재 주재원 배회근 씨(건국대 임학과 출신)와 함께 식사를 하러 갔는데, 식탁에는 말레이시아에서는 먹을래야 먹을 수 없는 ‘보쌈요리’를 해놓고 있었다.
어떻게 말레이시아에서 이런 보쌈요리를 만들 수 있느냐고 했더니 ‘제가 군대 있을 때 취사반에서 근무했지 않습니까?’라고 하는 것이 아닌가. 그래서 손 수 만들었다고 했다.

지금도 이 글을 쓰면서 그때의 맛있었던 보쌈 맛을 생생히 기억할 수 있다.

김상혁 한국목재컨설팅 상임 컨설턴트 shkim@witconsulti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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