갖은 고생 끝에 부산항에 도착한 설봉은 피난 보따리를 풀고 시청 앞 광복동 입구에다가 사무실을 하나 얻어서 천우사 간판을 걸었다. 맨 몸으로 떠나온 피난 길 이었기에 장사 밑천이 있을 리가 없었다. 그런데 천만 다행히도 부산 부두에는 6.25전에 일본으로 수출하려고 쌓아 두었던 형광석 3000여 톤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다시 말해서 부산 제 1부두에 쌓여있는 형광석이 천우사의 총 재산이었다.

그런데 매우 다급한 문제가 일어났다. UN군에서 명령이 떨어지기를 제1부두에 무기와 군수물자를 받아야 할 테니 24시간 내에  형광석을 다 치우라는 것이었다.

당시 형광석 값이 톤당 20달러는 족히 되었기 때문에 수출만 된다면 큰 밑천을 잡을 수 있었다. 그러나 실어 나를 배가 문제였다. UN군 측은 24시간내에 치우지 않으면 자기네들이 바다 속에다가 쳐 넣겠다고 호통을 쳤다.

이에 안절부절하고 있는데 마침 부두에 물건을 싣고 왔다가 빈배로 떠나는 그리스 선박이 한 척 있다는 정보를 입수했다. 그것도 일본으로 떠나는 것이었다. 설봉은 눈이 번쩍 뜨이긴 했으나 선주에게 지불할 운임이 수중에 없었다.

설봉은 동경에 있는 김용주씨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 때 친구 김용주씨가 주일 공사로 있었는데 , 이런 사정을 얘기하고 운임지급보증을 부탁 했다. 그래서 김용주공사의 주선으로 한국은행 동경지점장이던 김진형씨에게서 운임지불보증을 받아서 형광석 3000톤을 무난히 동경으로 수출할 수 있었다. 그리하여 형광석을 판돈을 밑천으로 천우사의 무역업무는 활기를 띨 수 있었다. 우선 직원들도 부쩍 늘어나게 되었다.

1951년 초에 20명이던 것이 1952년 초에 가서는 70명으로 늘어났다. 1952년 천우사의 영업 실적은 눈부신 발전을 보여 당시 전국 7대 상사중의 하나로 등장하게 되었고, 일본에서 입항하는 모든 상선에는 거의 빠짐없이 천우사의 수입품이 선적되고 있었다. 수출품도 거의 모든 물품을 다 취급하였는데 형광석, 동광석, 망간, 중석, 고철 등 일일이 헤아릴 수 없이 다양한 품목을 일본으로 수출하였다.

1953년 초에는 설봉은 일주일에 거의 두 번씩이나 일본을 왕래하며 무역업무를 하였다. 그래서 상무 이하 모든 직원들은 우리 사장님 무슨 일로 저처럼 고달프게 일본을 왕래하나 내심으로 걱정도 하고, 한편으론 이상하게 여겼다. 그 내용을 설봉이 설명해 주지 않아 직원들은 아무도 그 내용을 몰랐기 때문이다. 그러나 뒤에 어마어마한 것을 수입하는데 성공했다는 발표를 듣고는 모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설봉은 일본의 제일물산을 통하여 대맥 3만 톤을 아르헨티나에서 수입하기로 한 것이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설봉은 이한원씨(동아상사 사장), 김용성씨 등과 동업으로 제분업을 하기도 했다. 설봉은 그들과 함께 제분공장을 같이 하면서 한 때는 (1954년11월) 합동무역 주식회사라는 새 무역 회사를 창설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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