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화기업 주식회사 Ⅳ 동화기업, 대일(對日) 제재목 수출동화기업은 남양재 라왕 원목 수입, 판매뿐 아니라, 자체 제재소에서 제재한 라왕 제재목을 일본에 수출하기도 했다.1972년 당시에는 우리나라가 일본에 라왕 제재목 수출을 활발히 하고 있을 때 였는데 동화기업(대표 승상배)뿐 아니라, 신흥목재(대표 이훈돈), 보루네오(대표 김병수), 삼미사(대표 김두식)등도 라왕 제재목을 일본으로 수출하고 있어서 연간 1500만 달러의 제재목 수출이 이뤄졌다.1973년에는 대일(對日) 제재목 수출이 20 00만불로 늘어났는데 이때는 동양목재(OLC, 대표 박률선), 대이산업(대표 엄중섭), 현대신건재(대표 윤순선)도 라왕 제재목 수출에 참여해서 수출량이 늘어났던 것이다. 당시 일본의 제재
동화기업 주식회사 Ⅲ1971년, 인천제재단지 조성1969년 ‘동화개발호’를 완공한 동화기업 승상배 사장은 저목호 안쪽 대지 5만 3000여평에 제재소를 여러개 지어 임대하면 돈이 될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서울과 인천 등지의 도심에 있는 제재공장들이 이곳으로 오게 되면 기존 제재소에서 제재목을 만들 때보다 제조원가가 적게 들 것이므로 많은 제재소가 이곳으로 올 것으로 생각했다.즉 이곳에서 제재목을 만들 경우 원자재인 원목의 운반비를 절감할 수 있으며, 라왕 원목 1㎥ 제재하는데 1920원 57전(재당 6원 40전)정도로 시내 제재소에서 제재할 때보다 10% 정도 제재비가 싸게 든다는 것이었다.동화기업 승상배 사장(당시 51세)은 이러한 사실을 사업계획서로 만들어 농림부에 제출했다.
동화기업 주식회사 Ⅱ 지금은 매립돼 흔적조차 찾아볼 수 없는 ‘동화개발호’당시 사람들은 이 저목호를 ‘동화개발호’라고 불렀다. 1970년 동화기업이 ‘동화개발’이라는 현지 법인명으로 인도네시아 원목 산지 개발에 나서면서 당시 동화기업 보다는 동화개발이라는 사명이 더 널리 알려졌었다. 1969년부터 1975년 당시에는 말레이시아와 인도네시아에서 수입되는 라왕 원목은 거의 대부분이 물에 뜨는 원목이어서 원목 수입업자들이 원목을 수입하면 물에 띄워서 저장할 수 있는 장소가 필요했다.대성목재나 선창산업 같은 대형 합판회사들은 원목을 수입하면 자체 저목호를 보유하고 있어 그곳에 원목을 저장할 수 있었으나 일반 수입업자들은 수입한 원목을 저장할 마땅한 장소가 없었다. 1960년부터
동화기업 주식회사 Ⅰ창업주, 승상배 총회장1953년, 하왕십리에서 제재소로 출발오늘날의 동화기업 주식회사는 보드류 생산업체로 유명하지만 초창기에는 작은 제재소에 불과했다.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기 전인 1948년 4월, 창업주 승상배 씨(1921년생)는 동화토건(주)을 설립하고 건설 사업에 뛰어들었다. 승상배 총회장은 건설 사업을 5년간 운영하면서 목재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1953년 7월 서울 하왕십리에 동화기업이라는 작은 제재소를 차리면서 목재와 인연을 맺었다.1965년, 인천 가좌동으로 제재소 이전승상배 사장은 1965년도에 12년간 운영해오던 서울 하왕십리 제재소를 처분하고 인천시 가좌동으로 제재소를 이전했다. 서울에서 제재소를 운영하기 보다는 항구 도시인 인천에서 제재소를 운영하
삼산실업Ⅲ 2005년, 연간 매출 200억원 달성삼산실업은 보드류 외에도 천연 데크재·루바·후로링·계단재·집성목 등을 수입해 폭넓은 분야로 제품영역을 확장해 나가면서 2005년에는 연간 매출 200억원을 달성했다. 특히 삼산실업은 2003년경부터 천연 데크재를 취급해 왔는데 당시 친환경소재를 원하는 소비자들의 요구로 목조주택시장에서 수요가 증가해 매출을 올리는데 큰 보탬이 됐다. 삼산실업이 취급한 천연 데크재는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로부터 자연 건조된 제품을 직수입한 것이었는데 휨강도와 탄성계수가 높은 방킬라이, 크루인, 멀바우, 울린, 발라우, 꾸메아, 잠부잠부 등 품질이 우수하고 작업성이 좋은 데크재였다. 삼산실업 김낙기 대표는 “삼산실업은 가장 많은 수종의 천연 데크재
삼산실업 Ⅱ IMF 위기를 슬기롭게 넘기다외환위기가 도래했던 1997년을 우리 모두가 다 기억하고 있다. 그 해 11월 23일 정부는 국제통화기금(IMF)에 구제 금융을 신청했고, 그 여파로 금리는 25%로 폭등하고 환율은 1700원대로 껑충 뛰었다. IMF사태가 발생한 이면에는 ‘한보’사태가 있었다. 당시 김영삼 대통령 시절이었는데 정부 돈을 빌려 사업을 키워왔던 한보가 1997년 여름, 무너진 것이 IMF의 단초가 됐다고 볼 수 있다. 한보의 부도사태는 눈덩이처럼 불어난 은행들의 적자를 감당하지 못하게 했다.당시 은행들은 나라밖에서 단기자금을 차입해 한보 등 대기업에게 대출을 해줬는데 한보사태로 이자를 내지 못하자 단기자금을 빌려준 외국의 은행들은 자금을 회수하기 시작했다.
삼산실업 Ⅰ제재목 유통업으로 시작삼산실업은 현재 최상급의 보드류 제품과 천연데크재 및 양질의 목재제품을 수입·판매하는 목재유통의 전문기업으로 초창기에는 제재목 유통업으로 시작한 회사다.1987년 10월 어느 날, 연안부두 삼성타장 길 건너편 10평 남짓한 조그만 사무실에서 개업식을 한다기에 찾아가서 축하를 해주던 일이 엊그제 같은데 벌써 27년이란 세월이 흘렀다. 당시 필자가 대성목재에서 근무하고 있을 때였다.두 사람이 동업으로 출발삼산실업은 대성목재 출신 김낙기 씨와 김광채 씨가 동업으로 출발한 회사로 두 사람은 대성목재 73년도 입사동기이다. 당초에는 입사동기인 임흥순 씨가 참여하는 것으로 돼있어 회사이름을 三山이라고 지었다고 한다. 그러나 임흥순 씨는 당시 말레이시아 산다칸에서 원
선창산업 제재공장 Ⅶ 2004년 4월, 최신식 제재공장 착공선창산업은 2004년 4월, 당시 제재사업부 팀장인 조창근 부장의 감독하에 제재공장 건설을 시작했다. 한양목재의 부지를 매입한 땅 8700평에는 한양합판의 합판공장 건물이 있었다. 하지만 합판공장의 건물은 제재공장으로 사용하기에는 천정 높이가 낮아서 합판공장 건물을 헐고 천정높이를 3.5m로 맞춰 제재공장 건물을 새로 지었다. 그리고는 독일 링크(Link)社와 계약한 설비(150억원에 계약)를 설치했다.독일 링크社의 갱립 쏘(saw)는 초당 2.5m의 속도로 원목을 제재하며 일일 생산 1000㎥의 제재목을 생산할 수 있는 설비다. 라디에타파인 원목의 말구기준 14㎝부터 45㎝까지의 원목 투입이 가능하다. 원목 투입은 사
선창산업 제재공장 Ⅳ선창산업의 MDF 제2공장이 한참 가동될 때인 2004년 5월, 필자는 정해수 회장(당시 77세)을 인터뷰하러 선창산업을 방문했다. 당시 77세의 고령임에도 불구하고 허리가 꼿꼿하고 건강해 보이는 정해수 회장은 필자를 반갑게 맞이했다.당시 정해수 회장에게 뉴질랜드 정부가 원목 수출을 줄이고 가공재 위주로 수출하겠다는 정책을 발표한 직후여서 앞으로 뉴질랜드가 원목수출을 줄이면 선창산업을 운영하는데 있어 원자재에 문제가 생기지 않겠느냐고 질문했다. 이에 정 회장은 필자에게 뉴질랜드에 가본적이 있느냐고 반문했다. 뉴질랜드에는 가본적이 없다고 하자, 정해수 회장은 “뉴질랜드는 어차피 원목을 수출하지 않고는 못 배길 나라”라고 하면서 “뉴질랜드는 항만과 가까운 구릉지에 라디에타파인이 많
선창산업 제재공장 Ⅴ선창산업이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제재공장을 갖게된 이면에는 MDF공장이 있었기 때문인데 1999년 정해수 회장은 MDF공장을 또 하나 더 지을 계획을 세우게 된다.정해수 회장, MDF공장을 또 하나 더 지을 생각을 하다선창산업은 1994년 MDF공장의 가동을 시작한 생산초기에는 좋은 실적을 거두지 못했다. 생산을 시작한 첫 해인 1994년 10월 1일부터 1995년 9월30일까지의 매출액은 7억4200만원이었고, 이듬해에는 당초 계획의 절반에도 못 미치는 124억5600만원을 기록했다. 그러나 그 다음해인 3년차(1996.10.1 ~1997.9.30)에는 당초 목표를 초과 달성해 280억원을 기록했다.그러자 선창산업 정해수 회장(당시 72세)은 MDF공장을 하나 더 지을
선창산업 제재공장 Ⅳ 선창산업이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자동시스템 제재공장을 갖게 된 이면에는 MDF 공장이 있었기 때문이다. 선창산업이 MDF사업을 하게 된 속사정을 알아보자.MDF 사업 참여배경1990년대에 들어서면서 합판공장들의 원재료가 침엽수로 전환됐다. 선창산업 정해수 회장(당시 65세)은 MDF 공장을 지을 필요성을 적극 느꼈을 것으로 사료된다.합판공장의 수율이 55%라면 45%의 부산물이 발생하고 제재공장의 수율이 60%라면 40%의 부산물이 발생한다. 이 많은 부산물의 부가가치를 높여야겠다고 생각했을 것이며 그 부가가치를 최대로 높일 수 있는 사업이 MDF 공장의 건설이었다. 투자할 자본과 땅이 있다면 실현시킬 수 있는 사업이며, 더욱이 MDF 시장성이 있다
선창산업 제재공장 ⅢMDF 사업 진출1994년 선창산업은 MDF 공장을 건설하기 시작했다. 선창산업이 MDF 공장을 건설한 것은 후일 선창산업이 제재공장을 대형화하는 원인과 동기가 되었기에 선창산업의 MDF 사업진출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고자 한다.선창산업이 MDF 공장을 짓게 된 배경합판과 제재목만으로는 매출이익의 한계를 느낀 선창산업의 정해수 회장은 1993년 MDF 공장을 짓는 것을 검토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선창산업(오너 정해수, 당시 대표 이채득)이 MDF 공장을 지을 것을 검토하기 시작하는 1993년은 동화기업(1986년 가동), 대성목재(1989년 가동), 청담물산(1989년 가동), 거성산업(1991년 가동)이 이미 MDF 공장을 가동하고 있을 때 였으며 1993년 4월 동
선창산업 제재공장 Ⅱ1972년 5월, 인천 북성동 합판공장 가동선창산업이 합판공장을 서울 답십리에서 인천 월미도 북성동으로 이전 완료한 것은 1971년 12월이었다.1971년 12월, 공장이전을 완료했지만 기계 및 설비보완작업을 1972년 2월에 완료했고 다시 정밀한 점검과 시운전 과정을 거쳐 5월에 들어서야 본격 가동에 들어갈 수 있었다.1972년 7월, 제재공장 가동선창산업은 합판공장의 이전과 함께 제재공장 및 후로링 공장 이전도 함께 병행 추진했다. 제재공장도 수요기가 다가오기 전에 이전을 완료한다는 목표하에 1972년 3월 인천으로 옮긴 후 그 해 7월부터 생산을 개시했다. 제재공장은 수출품을 만들어 수출을 할 수 있도록 한다는 방침 아래 건조 시설, 가공 시설도 함께 설
선창산업 제재공장 Ⅰ 인천에 위치한 선창산업은 합판공장으로만 알려져 있지만, 거대한 자동시설의 제재공장도 운영하고 있다.선창산업이 거대한 제재공장을 지은 이면에는 MDF공장이 있다. 선창산업은 1995년 MDF공장을 건설하며 MDF사업에 진출했고, 2001년 MDF 제2공장을 건설하고 MDF사업을 확장하면서 원재료공급의 문제에 부딪혔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선창산업은 20 05년 거대한 제재공장을 지을 수밖에 없었고, 오늘날 그 제재공장으로부터 MDF 원재료의 50%를 공급받고 있다. 2010년 기준으로 봤을때 선창산업은 합판 매출이 33.3%, MDF 매출이 43.3%, 제재목 매출이 23.4%를 차지하고 있었다.선창산업의 출발은 연탄공장선창산업의 창업주 정해수씨(1928
경민산업 Ⅹ경민산업 2세, 이한식 대표2007년부터 부친 이경호 회장(現 83세)으로부터 경민산업을 물려받은 아들 이한식 대표(1959년생, 現 55세)는 현재 구조용 집성재시장이 활성화되고 있고, 대형 목구조 시장이 커지고 있는 것에 대해 우려를 하고 있다.“시장이 협소할 때는 몇 개 업체가 품질관리와 함께 시공에 대한 책임까지 졌지만, 수요와 함께 공급이 늘어나고 있어 제품에 대한 품질이 걱정된다”며 “구조용 집성재는 시공관리는 물론 제품을 제조할 때 철저한 관리도 매우 중요하다. 집성기술 자체가 품질과 성능을 좌우하기 때문이다. 수입산 구조용 집성재의 경우도 국내의 기후환경에 적합한지도 우려의 대상이다. 이런 걱정을 하는 이유는 최근 구조용 집성재의 공급량이 너무 많아졌기 때문이며 공급량
경민산업 Ⅸ 집성재로 만드는 세상을 꿈꾸다1978년 작은 제재소로 출발한 경민산업 이경호 사장은 1995년 집성재로 만드는 세상을 꿈꾸며 구조용 집성재 생산을 시작했다. 그로부터 35년이 지난 지금 경민산업은 우리나라 최고의 집성재 제조회사라고 하면 ‘경민’이라는 이름이 떠오를 정도로 업계 최고의 회사가 됐다.6년전부터 2세 경영이제 그 꿈은 그의 장남인 이한식 대표에게로 넘어갔다. 2007년 경민산업 이경호 회장(당시 77세)은 대표직을 큰 아들(이한식 씨)에게 물려주고 본인은 회장으로서 경영일선에서 뒤로 물러났다. 이경호 회장의 장남 이한식 대표(1959년생, 現 55세)는 1981년 성균관대학교를 졸업하고, 1983년 ROTC장교로 제대 한 후 삼성에 입사해서 3년간
경민산업 VIII 창업주 이경호 회장2005년에는 건설기술연구원으로부터 구조용 집성재의 내화성능 인정서를 받았다. 이로써 목조건축의 대형화 및 다층화(2~4층)가 가능해졌다. 2006년 경민산업(대표 이경호)은 인천시로부터 품질우수지정업체로 지정을 받았다.경민산업 이경호 회장은 문화재청에서 시행하고 있는 숭례문 화재로 손상된 목부재의 재활용 연구에 참여자로 선정돼 손상된 내력부재의 일부를 구조용 집성재로 만들어 숭례문을 보수·보강하도록 했다.산림휴양시설에 기여경민산업 이경호 회장은 한국녹색재단 이사 및 산림청 산림 정책심의위원회 위원으로도 활동해 산림청 산림정책에도 많은 조언을 했다. 특히 산림문화체험 휴양시설 조성에 많은 기여를 했다. 예를 들면 ▲미동산수목원의 목재문
경민산업 Ⅶ 창업주 이경호 회장이경호 회장(1931년생, 서울 출생)은 한달에 파푸아뉴기니를 몇번씩 오가며 파푸아뉴기니산 원목을 한국의 합판회사들에게 오퍼했다. 주로 부산지역에 있는 동명목재, 성창기업, 광명목재 등에 오퍼해서 팔았다.당시 배 1척을(6000㎥ 정도) 오퍼해서 팔면 1㎥당 1달러씩 쳐서 6000달러(당시 환율 400원 정도)를 받았다. 잘 될 때는 1년에 60배를 오퍼하기도 했다. 3년간 오퍼업을 했더니 돈도 많이 생겼다.이경호 회장은 1978년 원목 오퍼업을 그만두고 인천 가좌동에 제재소를 차렸다. 원목 오퍼업을 해서 번 돈으로 제재소를 하나 차리는 것은 큰 문제가 되지 않았다.제재소 이름도 오퍼상을 할 때의 이름을 그대로 사용해 ‘경민산업’이라고 했다
경민산업 Ⅳ2011년, 이경호 회장 철탑산업훈장2011년 4월 4일, 산림청은 경민산업 이경호 회장(당시 81세)에게 철탑산업훈장을 수여했다. 국산 낙엽송 간벌재를 이용한 구조용집성재를 개발, 공급해 국내 목재가공 산업발전에 크게 기여한 공로를 인정한 것이다. 목재업계로서도 자랑스러운 일이었다.1995년부터 구조용 집성재를 만들어온 경민산업은 2000년부터는 국산 낙엽송 간벌재를 이용한 구조용 집성재 제조기술을 개발해 국산재 활용에 크게 기여했다.그동안 제대로 활용가치가 없었던 낙엽송 간벌재를 부가가치가 높은 구조용 목재로 활용케 함으로써 산림을 경영하는 사람들에게도 계획적인 간벌을 가능하게 했으며, 건강한 숲을 키우는데 일조했던 것이다.원래 국산 낙엽송은 간벌 소경재가
경민산업Ⅴ2010년, 자동차 경주장에 육교 설치 2010년 8월 어느날, 이경호 회장(당시 80세)이 영등포구 신길동에 있는 한국목재신문 윤형운 대표를 찾아왔다.당시 필자는 신문사에 출근하면서 근무할 때였는데 점심시간이 되자 윤형운 대표, 이경호 회장, 안경호 사장(前 미국임산물협회 회장), 필자 넷이서 근처에 있는 설렁탕집에 점심을 먹으러 갔다. 당시 필자가 만난 이경호 회장은 80세의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허리가 꼿꼿하고 아주 건강해보였다. 역시 군에서 18년간 장교로 근무했다는 그의 말대로 건강만은 자신있어하는 모습 그대로였다.자연스럽게 화제는 그해 10월 영암에서 개최되는 자동차경주장에 경민산업이 육교를 놓기로 했다는 이야기로 시작됐다.이경호 회장은 “SK건